1. 개요
불교정화운동은 1954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개된 불교 내부 개혁운동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왜곡된 한국 불교의 승단 구조와 수행 전통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사미계에 반하는 결혼한 승려인 대처승 중심의 타락한 승풍을 정비하고, 비혼·출가자 중심의 비구 승단 체계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1]2. 배경
- 조선시대 유교 정권의 불교 탄압으로 인해 불교는 산중 중심으로 위축됨.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불교 제도(사찰령, 대처승 제도 등)가 도입되어 수행 전통이 훼손됨.
- 일본은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고 사찰 운영을 총독부가 통제함으로써 불교를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함.
- 광복 이후에도 일제의 불교 체제가 유지되었으며, 이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개혁 요구가 커짐.
3. 전개
-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승려가 아니다"라고 발언하면서 운동이 본격화됨.
- 비구 승려들이 전국 사찰에서 대처승을 축출하고 사찰 운영권을 장악함.
-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이 창종되어 정화운동이 제도적으로 마무리됨.
- 정화운동 이후 조계종은 비구 중심의 종단 체계를 확립함.
4. 갈등
- 많은 사찰에서 대처승과 비구승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
- 일부 사찰에서는 사찰 점거, 폭력 사태, 법적 분쟁 등도 동반됨.[2]
- 대처승들은 불법 축출이라 반발하며, 이후 일부는 '태고종'을 창립하여 독자 노선을 걷게 됨.
5. 결과
5.1. 긍정적 평가
- 비구 승단 중심의 수행 체계 확립
- 수행 중심 불교의 재정립
- 일제 불교 제도 청산
5.2. 부정적 평가
- 조계종의 태고종조설이 희미해 짐.[3][4]
- 강제적 방식과 물리적 충돌로 인해 불교 내부 분열 심화
-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개입 논란 (기독교 세력 견제 목적)
- 일부에서는 정치-종교 결탁으로 종단 장악 시도로도 비판
- 승려의 결혼과 성행위 문제에 관해서는 선불교의 근본정신[5]과 멀어졌다는 비판[6]
6. 영향
- 대한불교 조계종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으로 성장
- 대처승의 존재 및 승가 윤리 문제는 현재도 논쟁 중
- 정화운동은 불교의 수행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정치 권력과 종교 간 결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복합적 사건으로 평가됨
7. 관련 문서
[1]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 최인규 내무장관의 경우 깡패들을 머리를 깎여 스님으로 위장시키고 전국 각 주요사찰에 보내 비구승들이 대처승을 몰아내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3] 경허나 만공 등은 돈오점수를 주장했으나, 정화 이전의 청담이나 서옹 등은 돈오돈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돈오돈수를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밝히고 근거까지 들어가며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이 바로 성철[4] 성철스님이나 서옹스님의 경우에는 불교정화 이후 대처승들이 태고종을 창립하는 바람에 태고종조의 명분이 희미해졌고, 대처승들로 인해 태고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특히 서옹스님은, 한국 불교의 모든 승려는 태고국사의 법통을 대대로 이어받은 서산대사의 문손이며, 태고국사가 조사선의 종조이며, 그가 주장한 돈오돈수가 옳다고 주장했다.[5] 선(禪)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경계나 유위, 무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도덕에 있어서도 철저한 메타윤리학의 오류주의 입장에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선불교 조사들의 무애행이다. 조선 말기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대표적 선승인 경허(鏡虛)의 경우 이러한 관점에서 말년에 아예 환속해서 승려가 아닌 일반인으로 죽었다.[6] 조계종 승려 설지는 본래 선의 정신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견처를 두지 않는 중립적 입장(혹은 오직 모를뿐)이며 따라서 성추문을 일으킨 숭산에 대한 비판이 깨달음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