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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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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고구려부흥운동2.2. 백제부흥운동2.3. 신라부흥운동2.4. 발해부흥운동2.5. 고려부흥운동2.6. 조선부흥운동2.7. 한국독립운동

1. 개요

부흥은 쇠퇴했던 것을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국사에서 이미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부흥운동이라 칭한다.

2. 목록

2.1. 고구려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高句麗復興運動
존속기간 669년 ~ 918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주요 인물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걸걸중상
걸사비우
대조영
궁예
왕건
주요 사건 668년 고구려 멸망, 안승 추대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
673년 당에게 패배
→신라의 안승 보덕국왕 책봉
698년 발해 건국
901년 태봉 건국
918년 고려 건국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멸망 이전 고구려
성공 이후 소고구려, 발해, 태봉, 고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은 평양성 이외 각지에서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먼저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현재의 황해도한성을 지역기반으로 둔 검모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와 협력해[1] 나당전쟁에 참여했지만 나당전쟁 초기 내분으로 검모잠은 살해당하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황해도 지역의 고구려 부흥군은 나당전쟁 초기에 신라군과 연합해 계속 싸웠지만 석문 전투 패전 등 당군의 대공세로 실패하고 많은 고구려인이 신라로 도망치게 된다. 신라는 이들을 한반도 남부 금마저에 정착해 살게하고 일종의 고구려계 자치집단인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안승서라벌로 불러 경주시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반굴의 아들 김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보덕국인(보덕국에 살던 고구려 유민)+말갈인), 적금서당(보덕국인)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고, 그 중 고구려의 왕족 안승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선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2][3]

이와 별개로 고구려의 고토 요동에선 별도의 고구려 부흥 노력이 있었다.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4]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으나,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으며,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봐야 당의 부용국 신세였기에 부흥운동의 결과로 보긴 꽤 어렵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발해도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소고구려가 또 존재하는 것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한편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요서의 영주(융저우)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만주 동부 동모산으로 도망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30여년만에 이뤄낸 성공적인 부흥운동이었다. 동모산은 옛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고 배경 때문에 발해에겐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발해에겐, 당나라와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국제 사회에서 고려로 행세하질 못한 뼈아픈 한계가 있었다. 후술하지만 이런 측면에선 고려보다 크게 처진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누군가들이 보기 좋게 영토만 크게 차지한다고 장땡이 아니었다는 얘기.

한편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세운 일도 있었다. 직접적인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며, 제도 또한 이전 고구려나 발해와 비슷한 면이 많이 보인다. 다만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 정권은 고구려 유민들이 물론 정권의 수뇌부이긴 했으나 당나라 사람들 또한 당연히 제나라 정권에 협력자로 많이 참여했고, 이정기 일가의 속마음은 정확힌 알 수 없지만 제나라는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여러 지방 절도사 정권 중 독립성이 보다 강한 정권에 불과했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도 신라는커녕 발해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슬람 제국사에서도 아랍인들에게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인들이 중심이 된 강력한 군사 정권들이 있었고, 이들이 내심 사산조 페르시아를 의식했던 게 사실이지만 적어도 사파비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사산조의 군주 호칭을 가져다 쓰지 못했던 사례들과 비슷하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데 성공했고, 왕건의 쿠데타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도 국명에서부터 엿보이듯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경우 통일신라의 영역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깎아서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고려는 예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직접 지배를 제대로 하질 못했던 대동강 이북으로도 약간 올라간 영역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가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신라 구왕족 계열에 한정된 조치는 아니었고, 고려는 굳이 경순왕의 귀부가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신라에게서 대왕 인정을 받는 등으로 확고한 외교적 우위에 있었으므로[5] 이 혼인 정책을 통해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곤 볼 수 없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도한 서경파가 신라계인 주류 개경파가 대립했다는 것도 상당히 잘못 알려진 설이다. 서경 세력 자체가 왕건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세력이었고, 개경의 정치 세력 자체가 신라계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설이다. 그나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내세웠다는 것도 결국은 "신라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삼한 계승"이었다.

고려가 건국되었을 당시까지는 성공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또 다른 사례인 발해가 엄연히 그때까진 엄존하고 있었으나, 발해는 옛 고구려의 중심지와 동떨어진 말갈인이 주로 거주하는 영역에 세워졌던 탓에 고려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후계자란 명분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던 데다가 한반도에서 후삼국시대가 진행되던 당시에는 발해 역시 왕조말기 증상으로 힘이 약해져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을 전혀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는 영토로만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만주 애호 현상을 만족시켜주기 충분했지만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 두 나라는 발해를 도저히 고구려로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 또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국제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 수가 없어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고려 국왕'을 자칭할 수있었고 당과 신라를 상대할 때는 결국 '발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다. 서양사의 불가리아 제국도 초반에는 로마 제국과 동등한 황제를 자칭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일단 로마에게 망한 후 부활했을 때는 로마 제국의 위신 문제 탓에 로마 제국은 처음과는 달리 도저히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잠깐 재흥한 불가리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의 계속된 분쟁 끝에 바실리우스 2세에게 망하고 만다. 발해는 신라와 당에 대해 계속해서 고구려의 후계자를 무리하게 국서에서 고집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현대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의 관계 탓에 마케도니아 국명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대만 또한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국제사회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였다.

반면 적어도 궁예와 왕건의 고려는 이 문제에 관련해서 매우 자유로웠다. 딴지를 걸 당나라가 당시엔 이미 오대십국시대의 개막으로 무너져 없었던 데다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또 다른 주역인 신라는 후삼국시대 들어서는 이미 왕건에게 압도당해 고려왕 왕건을 도리어 대왕으로 칭해주고 신라왕 자체를 대왕 고려왕의 아래에 스스로 두는 굴욕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의 기호일 만주 영토와는 전혀 별개로 명분에서 그다지 밀릴 형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발해가 국력을 추슬렀다면 얘긴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발해인들을 '형제'로 일컫는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강자의 입장에서 호기롭게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은 훗날 다시 한 번 내부에서 정면 도전을 받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기 무신들의 거듭된 권력쟁탈전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했는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최광수가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高勾麗興復兵馬使 金吾衛 攝上將軍)을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자칭한 관직명은 고구려 부활이란 명분이 드러나 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후삼국 시기에 비해서 약해졌을망정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6]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의 난 진압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권력의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 (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하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비슷한 시기의 신라 부흥 운동, 백제 부흥 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나도 강렬히 드러나 있는데다,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관 별개로 고려(=고구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고려 왕가의 출발점인 개경 호족 또한 서경 호족과 마찬가지로 신라 치하에서도 나름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들인 패서 계열 호족들이었고, 서경 세력 자체가 애초에 왕건이 집중적으로 황해도와 개경 일대의 호족들을 이민시켜서 육성한 게 시초였던만큼 고구려의 옛 수도가 근거란 이유만으로 고구려 계승성이 더 있다고 내세우기엔 약간 명분에 하자가 있었다. 이 마지막 고구려 부흥운동(?)은 1217년에 최광수가 서경성을 빼앗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군사를 모으고 북계 지역에 격문을 돌리며 세력을 키웠지만 반란에 회의를 느낀 정의의 암살로 끝나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후 여몽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토가 몽골군과의 전장이 되면서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날 여력이 없어졌고 이 시기를 거쳐 삼국유민의식이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구려부흥운동은 사실상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고려왕조는 통합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각지의 유민의식을 희석시키게 되었고 뒤이어 나온 조선도 고려의 폐단을 개혁했다고 했지 고려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조선대의 통치시스템은 고려의 통치시스템을 계승, 계량해서 사용한 것이다. 조선이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다는 점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지은 한시인 안주회고에서 드러난다. 당시 명나라 사신인 축맹이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살수대첩일화를 바탕으로 시를 지어 화답해주었고 축맹은 불쾌한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편 조선왕조는 고려(=고구려)라는 이름이 옛 삼국 중 하나의 이름인데서 정통성이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 국명도 대과거인 고대왕조 고조선에서 따 오고 삼국의 시조묘 제사를 똑같이 우대하는 등 삼국 중 어느 나라도 직접 계승하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고조선에대한 계승의식은 고려왕조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왕조는 통일이후 유민의식을 희석시키는 한편 패서지방의 권위 강화 목적으로 고조선을 이전시기보다 띄워주기 시작했다.[7]

2.2. 백제부흥운동

삼국통일전쟁 문서의 백제부흥운동 단락과 후백제 참조.

사실 신라는 고구려 부활 가능성보다는 백제 부활을 방지하는 데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때문에 공주와 사비 일대에 적극적으로 신라 진골 출신을 이민시키거나, 백제 왕가가 집중적으로 육성했던 제2수도권인 전북 일대에 고구려 유민들을 사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신라 체제 자체는 경제력이 성장하여 지방 세력들도 나름대로 충분히 실력을 쌓았으나 중앙에 진출할 경로는 차단되고 지방에 이식된 다름아닌 옛 진골 출신들도 권력에서 밀리게 되자, 신라로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결국 다름아닌 원신라 지역 출신인 신라 장군 견훤이 백제를 부활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통일신라 이후 백제나 고구려같은 부흥 운동을 '진짜 유민들'이 일으킨 게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이 있지만, 멸망한 지 시간이 얼마 안 흘러야 하고 통일신라가 융화 정책을 시도라도 안 했을 상황에서만 있는 게 '진짜 유민'이란 관점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독자 연구다. 그러한 유의 얘긴 1945년에 조선인 따위는 없었고 죄다 일본 제국 신민이었다는 멍청한 일본 유저들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애초에 당대 정권에 대항한다면 망한지 오래된 나라 이름을 구태여 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들은 많으며, 그런 게 통할 수 있는 조건은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 밖엔 없다.

국가 정체성은 어떤 국가의 국체가 소멸되었다고 사람들 마음에서 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며, 상황이 바뀌면 그것이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오백 년이든 어떤 이유로든 정체성이 불식될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표출될 수가 있다. 다만 망한지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예전에 망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기에 이것이 수학 공식처럼 늘 어느 상황에서든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뿐. 때문에 후백제가 멸망한 후 300년이 지난 1236년에 나주에서 이연년 형제가 담양에서 최씨 무신정권에 반감을 가진 사람을 모아 백제 부흥운동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호응도나 성과는 후백제 때만 못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슷한 시기 고려 치하에서의 신라부흥운동보다 파급력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

단, 전라도=백제가 오류인 동일시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맞지만, 충청도와 경기도만 백제며, 전라도는 무조건 마한이므로 백제와 후백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 또한 조선 시대에 생긴 행정구역 개념과 근대 들어 생긴 지역감정 대립 구도를 무리하게 밀어올리다 하게 되는 논리비약이므로 역시 수정되어야 할 흔한 편견 중 하나다.

경기도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백제는 직할 통치 구역은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인식과는 달리 황해도 남부 일대와 경기도, 충청남도 약간 지역 뿐이었으며, 이후 경기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거진 다 빼앗긴 후엔 충청도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충북은 실제론 신라와 각축하던 지역이고 대전 일대도 오늘날 동대전 지역은 신라가 영유했었다. 이 시기의 백제가 직할 경영하던 곳은 충청남도 대부분과 전북 상당 부분인데, 한성 백제와 겹치는 지역 또한 많진 않다.

후백제 또한 교과서에서 주로 그리는 영토와는 달리 경상도 대부분과 충청남북도 상당 부분을 영유했고, 거꾸로 전남 지역은 고려에게 상당히 영역을 빼앗긴 형국이었다. 주로 잘 알려진 특정 시기에 한하는 영토를 떠올리면서 겹치네 안 겹치네를 하며 관계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이런 속지주의식의 이상한 프레임에선 저 위 문단의 고려와 고구려도 별 상관이 없으며, 당연히 특정 시기에 잘 알려진 강역의 일치만 따지는 견해는 상식적인 역사 해석에서 설 자리가 없다.

2.3. 신라부흥운동

신라부흥운동 문서 참조.

신라는 삼국시대에 멸망한 적이 없었으므로 신라 부활 시도는 고려 중기의 혼란기 무신정권시대에 국한된다. 주요 주모자층은 고려 시대때 향리 계층으로 떨어져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옛 신라 진골 출신들이었던 걸로 추정되며, 원신라지역 출신의 중앙 집권자였던 이의민이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훗날 신라부흥운동이 벌어진 지역들은 경주 외엔, 후삼국시대 당시 견훤의 대대적인 침탈 이후 후백제에 대한 두려움 탓에 자발적으로 신라 왕실을 버리고 고려에게 투항했던 지역들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왕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도 고려 왕실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흔들리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중앙 정부에 충성하는 지방 세력을 조직적으로 육성했었기에 신라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로마의 동맹시 전쟁 당시 반로마 동맹 안에 구멍처럼 친로마 도시들이 숭숭 뚫려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부흥운동이 장악했던 지역도 강원도와 경상도 적지 않은 일대라 꽤 넓어는 보이지만 구멍처럼 관망파 내지는 적극적인 고려 찬성 지역들이 많이 뚫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구려부흥, 백제부흥을 외치는 반신라운동이 초반 동참 지역은 적었어도 꽤 응집력은 있었던 것관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에 경주를 비롯해 신라부흥운동에 동참하는 군현들에게 스스로 대항해서 자발적으로 근왕군을 조직했던 곳이 본디부터 신라 지역이었던 경북 영주였던 현상은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

2.4. 발해부흥운동

2.5. 고려부흥운동

조선 건국 초기 왕씨 몰살을 통해 무자비하게 싹을 잘라냈는데, 사찬읍지인 고령지에 따르면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고려의 안동장군 이미숭, 진서장군 최신 등이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니산, 덕대산, 운라산성 등에서 패하고 상원산에 성을 지어 항거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군사를 해산했다 한다.

2.6. 조선부흥운동

1910년에 임병찬이 만든 독립의군부라는 단체에서 고종의 복위를 내세웠지만 일제에 발각당해 실패했고, 1919년에 고종이 사망하자 일본을 몰아내고 구 대한제국(조선) 황실이 다스리는 국가를 세우려던 복벽운동도 흐지부지된다.

2.7. 한국독립운동

외세에 항거하여 계승하는 국가를 세우게 되는 한국독립운동 역시 부흥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1]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당시 북진하는 신라군에게 전쟁 없이 항복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싸워온 당나라에 대한 반당감정에 비해서 반신라감정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역시 나당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원세력 하나하나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므로 두 세력의 뜻이 맞았다.[2] 이 점은 진평왕~무열왕까지 신라를 가장 크게 위협한게 고구려가 아닌 백제인 탓이 큰듯하다.[3] 문무왕 때는 전과 같은 벼슬을 내리는 등 꽤 좋은 대우를 하였으나 계속 지속된 기조는 아니었으므로 신라의 일관된 정책으로 볼 수는 없다.[4] 당연히 고조선에서 유래.[5] 아이러니하지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려가 바로 신라와 이러한 관계에 있었다. 왕경 코앞과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굴욕적인 군사령부의 존재도 그렇고, 신라 입장에서는 몇 백 년만에 다시 처하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었다.[6] 비슷한 시기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이연년의 난, 신라 부활을 명분으로 건 이비 · 패좌의 난이나 김사미 · 효심의 난도 일어났다.[7] 삼국은 미약하지만 고조선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조선의 중심지가 당시 패서지방이기게 정권의 정당성에도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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