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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000> 사마드 니카 바라미 Samad Nikkhah Bahrami .محمدصمد نیکخواه بهرامی | |
| 본명 | 모하메드 사마드 니카 바라미 Mohammad Samad Nikkhah Bahrami |
| 출생 | 1983년 5월 11일 ([age(1983-05-11)]세) |
| 국적 | |
| 신장 | 198cm |
| 체중 | 96kg |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 소속 | 이란 나라 (2001~2005) 사바 배터리 (2005) 페트로치미 반다르 이맘 (2005~2008) 사바 배터리 (2007~2009) 마흐람 테헤란 (2009~2014) 페트로치미 반다르 이맘 (2014~2016) 광저우 롱라이언스 (2016~2018) 마흐람 테헤란 (2019~2021) |
1. 개요
이란의 前 농구 선수로,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이며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파디 엘 카티브, 하메드 하다디와 함께 한국 대표팀을 여러 차례 좌절시키면서 국내에도 유명해진 선수다.2. 선수 경력
2007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란 농구는 아시아 무대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체격 조건은 뛰어났지만, 체계적인 시스템 부재와 유망주 육성의 한계로 인해 한국, 중국, 필리핀 등의 강국들에 밀려 ‘변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린 2007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는 이란 농구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마드 니카 바라미가 있었다.바라미는 하메드 하다디와 함께 이란을 아시아 정상으로 이끈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그는 아시아 최정상을 꿈꾸기 어려웠다. 당시 이란 농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진행된 FIBA 아시아컵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 농구가 아시아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저는 겨우 15세에서 17세였고, 당시 이란은 농구보다 다른 종목에 더 관심이 많았죠. 하지만 제 안에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은 있었어요.”
또한 바라미는 친구들과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끼리 자주 나누던 얘기가 있었어요. 언젠가는 프로 선수가 되어 해외에서 활약하고, 많은 돈을 벌면서 유명해지는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거죠. 처음엔 단순한 꿈이었지만, 차츰 현실이 되어갔고 우리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마침내 2007년 도쿠시마 대회에서 결실을 맺는다. 이란은 그 대회에서 창단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 챔피언에 오르며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만이 차지했던 우승 타이틀에 이란이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바라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경험 많은 베테랑들과 젊은 선수들이 함께했어요.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주축 선수들이 하나둘 빠지면서 전력이 약화되었죠. 많은 이들이 우리가 2라운드조차 가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믿었고,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결국, 우리는 그것을 이뤄냈습니다.”
이란은 요르단, 필리핀, 중국과 함께 A조에 속해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2라운드에서도 카타르와 대만을 꺾으며 4강에 올랐다. 레바논에 패한 것은 유일한 패배였다. 4강에서는 카자흐스탄을 75-62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 상대는 다시 만난 레바논이었다. 당시 레바논은 파디 엘-카티브가 이끄는 아시아 최강팀으로 평가받았다.
“결승에서 이기면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죠. 그저 ‘좋은 대회에 나간다’ 정도였어요. 협회장이 보드에 ‘우리가 올림픽에 나가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써 놓았던 기억이 나요. 경기를 마치고 라커룸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모두 ‘우리는 올림픽에 간다!’고 외쳤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007년 이후 이란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농구 무대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올림픽이라는 세계 최고 무대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이어 2009년 중국 톈진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중국의 독주 체제를 무너뜨렸다.
“2009년은 2007년보다 오히려 수월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가 2007년에 중국의 최정예 멤버가 아니었기에 우승했다고 했지만, 2009년 결승전에서 오히려 더 강해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죠.”
한편, 바라미가 꼽은 ‘아시아 베스트 5’에는 자신과 함께 코트를 누빈 하메드 하다디, 메흐디 캄라니, 그리고 필리핀의 게이브 노우드, 요르단의 자이드 압바스, 레바논의 파디 엘 카티브가 포함됐다.
그는 특히 파디 엘 카티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샘 더글라스와 자이드 압바스는 2011년에 우리를 꺾은 대단한 선수들이었죠. 하지만 파디 엘 카티브는 단순한 경쟁자를 넘어서, 서로를 자극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존재였어요. 그와의 경쟁 덕분에 저 자신도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매일이 전쟁 같았죠.”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은 3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이란과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아시아 최고 포워드로 꼽히는 바라미의 폭발적인 공격력 때문이었다.
이날 바라미는 양 팀 최다인 무려 30점을 쏟아부었다. 고비마다 고감도 슛을 꽂으며 대표팀을 괴롭혔다. 특히 대표팀이 70-73으로 뒤진 종료 2분 2초 전 중거리슛으로 5점 차 리드를 달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듯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은 막판 경기를 뒤집었다. 종료 1분 9초 전 양동근의 3점포와 36초 전 김종규의 골밑 3점 플레이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래도 끝까지 대표팀을 긴장시킨 선수가 바라미였다. 75-78로 뒤진 종료 14초 전 바라미는 패스를 받자마자 곧바로 미들슛을 꽂아 1점 차까지 추격했다.
바라미는 한국이 문태종의 자유투로 79-77로 앞선 종료 직전에는 과감한 3점슛을 던졌지만 실패, 이어 하다디의 골밑슛도 빗나가면서 한국의 금메달이 확정됐다. 종료 직전까지 대한민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었다.
경기 후 바라미는 눈물을 흘리며 패배의 아쉬움을 곱씹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파디 엘 카티브와 함께 아시아 최고의 포워드로 뽑힐 만큼 뛰어난 슈팅 능력과 돌파력을 모두 갖춘 만능형 포워드였다.
하메드 하다디와 함께 한국 대표팀 입장에서는 재앙에 가까웠다. 이란 국가대표팀의 1옵션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으며 수차례 한국 대표팀에게 좌절을 안겨준 선수다.
4. 수상 내역
4.1. 개인 수상
| 수상 내역 |
FIBA 아시아 챌린지 MVP ( 2012 )
FIBA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4회 우승 (2007, 2008, 2009, 2010)
FIBA 아시안 클럽 MVP(2007)
2회 올림픽 출전(2008, 2020)
댈러스 매버릭스 소속으로 NBA 서머리그 에 참가
4.2. 팀 수상
FIBA 아시아 챔피언십금메달 – 1위 2007 도쿠시마
금메달 – 1위 2009년 톈진
금메달 – 1위 2013년 마닐라
동메달 – 3위 2015년 창사
아시안 게임
은메달 – 2위 2014년 인천
은메달 – 2위 2018 자카르타-팔렘방
동메달 – 3위 2006 도하
동메달 – 3위 2010 광저우
아시안컵
금메달 – 1위 2012 도쿄
윌리엄 존스 컵
금메달 – 1위 2009 타이베이
금메달 – 1위 2011 타이베이
은메달 – 2위 2012 타이베이
금메달 – 1위 2013 타이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