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8 16:29:45

밀리스 프랑세

파일:Flag_of_the_collaborationist_French_Militia.svg
Milice française (la Milice)
슬로건
<colcolor=#000000> 영문 명칭 <colbgcolor=white,#010101>Milice
한글 명칭 밀리스 프랑세
창당일 1943년 1월 30일
해산일 1944년 8월 15일
성격 준군사조직
지휘관 조제프 다르낭
국가 비시 프랑스
조직가 집단의 노래 (Le Chant des Cohortes)
1. 개요2. 역사


1. 개요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인 비시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를 소탕하기 위해 만든 준군사조직

2. 역사

조제프 다르낭은 1차 세계대전과 1940년 전투에 참전한 군인이자 극우 활동가로, 니스에서 전투원단 지부를 이끌며 프랑수아 다를랑과 피에르 퓌슈의 후원을 받아 1941년 치안조직인 SOL을 창설하고 이를 남부 전역 1만 5천 명 규모의 극우 성향 준군사 조직으로 확대한다. SOL은 반자본주의·반공산주의·반유대주의·반프리메이슨 등의 21개 강령을 내세웠고, 1943년 1월 30일 법으로 공식 창설된 민병대(밀리스)에 흡수된다. 라발과 페탱은 독일의 치안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이 조직을 국가적 치안·정치 도구로 삼았고, 라발이 명목상 수장, 다르낭이 실질적 책임자가 된다. 민병대는 자발적·비유대인·비비밀결사 회원만 허용하며 정치 선전과 치안 유지를 목표로 했고, 상징으로 감마 문양을 사용했다. 다르낭은 민병대가 국가 재건을 위한 정치 조직이라고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와 내부 저항을 탄압하는 역할이 커졌고, 마우라스 역시 이를 국내 반혁명·치안 강화 수단으로 지지했다.

필리프 페탱피에르 라발은 끝까지 민병대(밀리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라발은 다르낭과의 협력을 민주주의·볼셰비즘 반대 논리로 정당화했다. 민병대는 반유대·반공·반공화주의·권위주의·국가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삼아 파시즘적 단일당 체제의 핵심 조직이 되려 했고, 이는 비시 정권의 파시즘화와 독일 종속 심화를 보여준다. 1943년까지 무장조차 못한 민병대는 저항세력, 특히 공산주의 FTP의 공격을 받으며 무력함을 드러냈고, 독일의 비협조 속에서 다르낭은 일시적으로 저항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결국 1943년 8월 나치 SS에 입대하고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하며 완전히 독일 편에 선다. 이후 무장을 허가받자마자 민병대는 마키와 FFI에 대한 보복 작전과 탄압을 본격화했다. 다르낭은 1944년 내무 치안 책임자로 승진했고, 민병대는 행정권과 경찰·군사 기능을 잠식하며 국가 기구를 대체하려 노력했다.

조직은 최대 3만 명을 주장했으나 실제 활동 인원은 훨씬 적었고, 대부분은 하층·중간층 직업 종사자들이었으며 일부는 모험심·경제적 이유로 참여했고 이념적 확신은 제한적이었다. 민병대는 게슈타포와 협력해 유대인 체포와 홀로코스트에 가담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고문·약탈·살해·즉결처형 등 극단적 폭력을 행사했으며, 정치인과 지식인 암살에도 관여했다. 1944년에는 전쟁범죄 수준의 잔혹 행위가 늘어 국민적 증오가 극에 달했고, 부패·폭력·협잡으로 신뢰를 잃은 민병대는 독일에도 무능한 파트너로 평가받았다. 1944년 프랑스 내전적 충돌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저항 측은 폭력 사용을 제한하려 한 반면 민병대는 폭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해방이 가까워지자 페탱조차 민병대의 만행을 우려했으나, 다르낭은 그동안 격려해 놓고 이제 와서 책임을 돌린다며 반발했다.

해방 시기와 직후에는 민병대가 ‘자발적 숙청’의 주요 표적이 되어 300~600명이 즉결 처형되었고, 그중 1944년 8월 그랑보르낭에서는 97명 중 77명이 하루 만에 총살당했다. 최초의 합법 재판은 1944년 9월 2일 그르노블에서 열려 우리아주 학교의 젊은 민병대원 12명이 심리되었고, 6명이 공개 처형되었으나 이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와 정부가 공개·즉결 처형을 금지하게 했다. 해방 후에도 민병대는 잔존 지역에서 학살을 지속해 10월 벨포르에서는 독일군이 넘긴 마키 대원 27명을 처형했다. 전후 다르낭은 1945년 사형을 당했고, 리옹 민병대 사령관 폴 투비에는 수십 년 도피 끝에 1994년 프랑스인 최초로 반인도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9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