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민명재(閔明在) |
출생 | 1893년 12월 25일 |
한성부 남부 명철방 쌍림동계 쌍림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1] | |
사망 | 1941년 12월 20일 |
경기도 경성부 |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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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귀득은 1893년 12월 25일 한성부 남부 명철방 쌍림동계 쌍림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에서 어머니 김성녀(金姓女)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광희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2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직공으로 일했다.그는 1919년 3월 23일 밤 9시경 경성부 연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의 동명탕(東明蕩)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종로5정목(현 종로구 종로5가) 오교(午橋)[2] 부근에서 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왕래 방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 중 일부가 취소되어 징역 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다시 상고했다. 그러나 1919년 9월 2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되었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2월 21일 가출옥했으며, 이후 경성부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1년 1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민귀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