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0 15:34:28

무기대여법

랜드리스에서 넘어옴
Lend-Lease

1. 개요2. 특징
2.1. 영국2.2. 소련2.3. 중국(중화민국)
3. 전후 상황4. 의의5. 추축국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장한 미국의 대연합국 물자지원 계획.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위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자는 취지였으며, 1941년 3월 11일에 시작해 1945년 9월 2일에 종료했다. 그 이후로도 이미 보내기 시작한 건 운송을 계속해서 그 해 9월 20일에 원조를 끝냈다. 항복한 적성국에 주둔하는 부대를 위한 장비 소요, 중간에 중단할 경우 소요되는 행정 비용이 더 많은 경우 등을 고려한 것이다.

2. 특징

각종 무기나 군수품 외에도 식량이나 연료도 지원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0년에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 정책의 일환이다.

유럽 연합군의 주력이었던 국가들은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소련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고, 거기다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탈탈 털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다. 영국도 1차 대전에 엄청난 전비를 퍼부었고 경제도 엉망이었기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휘말렸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국 국민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이것을 지난 대전에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던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커버하는 것.

2.1. 영국

Spam, Spam, Spam, Spaaaam, Lovely Spaaaaam, Wonderful Spaaaaaaaam!

무기대여법에 따른 지원을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영연방 전체)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다. 영국은 군함을 많이 얻어갔는데 군함의 가격은 다른 무기 체계와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비싸기 때문이다.

영국 육군은 무기대여법의 영향으로 사실상 전차의 주력이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이는 보병전차순항전차로 이원화된 전차 개발 구조의 문제에다가 및 그 결과물도 상황에 쫓겨서 급조하는 등 영 신통치 않아서 자원을 낭비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한 보병전차는 장갑 면에선 그나마 쓸만했으나, 전쟁 초기 주력 대전차포인 2파운더는 관통력에 올인하는 바람에 포탄의 작약이 없었고, 고폭탄을 만들지 않아서 대보병 능력이 개판이었다. 6파운더는 그나마 상황이 양호했으나 처칠의 트롤링으로 배치가 지연되었고 결국엔 미국의 75mm 포를 가지고 새로 주포를 만들게 된다. 순항전차는 삽질에 삽질을 연속으로 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즈음에 투입된 센토어, 크롬웰부터 그나마 전차 구실을 할 정도로 쓸만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센토어와 크롬웰도 어디까지나 쓸만하다는 수준이지만. 물론 영국의 기술력도 출중하였으므로 파이어 플라이나 M10 아킬레스 같이 셔먼 전차나 울버린 대전차 자주포를 개조한 개량형도 많이 생산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그 증거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전차의 이름은 영국군이 많이 지어 줬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하랴.

대전차 주포라면 몰라도 자주포 면에선 전차 개발보다 삽질의 연속이라 비숍 자주포 같은 망작만 만들다가 영연방의 캐나다가 만든 미국의 M3 리 전차를 기반으로 만든 램 2 전차를 개조해서 만든 섹스턴 만이 영연방의 성공작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 느린 보병전차 발렌타인을 개조한 비숍 자주포를 쓰다가 미국으로부터 명품 M7 프리스트를 받자마자 전부 다 갈아치우고 전쟁 내내 M7을 썼다. 물론 105mm를 쓰는 M7의 탄환이 호환되지 않으므로 더욱 더 돈이 나갔다. 영국제 화포들이 타국보다 저구경 고관통의 경향을 가지기는 하지만 전차포에 한정해서는 그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단지 구경에 비해서 작약이 적었던 게 문제였을 뿐. 대전기 주력인 17파운더는 같은 구경인 3인치 주포에 비해서 관통력은 월등하나 포탄이 포압을 견디기 위해 작약량이 그 절반이라서 대보병 능력이 떨어진 게 이에 부합하는 사례로 한국전쟁 때 캐나다 C중대가 대보병을 위해 17파운더 아킬레스를 버리고 M4를 재수령한 것도 그 이유가 작용했다. 다른 나라들은 75~90mm 사이의 구경이 표준이었고 혼자 85~122mm에서 놀았던 소련이 특이한거지 영국 전차포의 구경이 특별히 작은 건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영국이 당장 쓸 120mm 전차포가 없었기에 영국의 120mm의 시작은 미국의 120mm M1 대공포를 사옴으로써 시작했다. 17파운더 대타로 나온 20파운더 또한 미제 90mm 포보다 관통력과 명중룰은 좋으나 그 놈의 83.4mm라는 점과 포압 + 작약으로 고폭탄 화력은 밀렸다. 그 후속 주포인 로열 오드넌스 L7은 고폭탄 화력까지 잡으면서 서방권 표준 전차포로 자리잡게 되지만.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 항공모함 및 호위 구축함을 지원받았다.[1]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으로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한 마디로 미국 없었으면 모든 유형의 전쟁 자체를 유지하기도 곤란했다는 이야기다. 옛날 모자랄 것 없었던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개망신 그 자체다. 그리고 이러한 함선 지원의 대가로써 영국은 레이더 기술, 전투기 엔진 설계도 등의 최신 기술들과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을, 곧 카리브 해 제해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게 된다. 전후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2000년대까지 프리깃 한 두 척을 상시 마약 등의 밀수 단속 임무차 카리브 해에 초계함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철수시키고 미국 해안경비대에 넘겨 버렸다.

영국이 넘겨준 레이더 기술은 미국이 바로 응용하여 최신 레이더를 곧바로 대량생산, 기존에 사용하던 수상기와 폭격기에 붙혀 대잠초계기로 만든다음 대서양에서 U보트를 잡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영국은 어떻게 보든 이득본 샘이다.

또, 식량자원을 엄청나게 많이 공급받았는데, 바닷바람이 불고 날좀 풀렸다 싶으면 비가오는 영국 본토 사정상 자국내 생산량으로는 식량자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 요리는 말 그대로 스팸처럼 쏟아지는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제 완제품,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오늘날 불필요한 메일을 일컫는 '스팸메일'이 이런 스팸만 먹던 영국의 사정에서 나온 말이고, 그 유명한 피쉬 앤 칩스를 생선 대신 스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물론 영국이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아서 영국이 소련에 제공한 물자도 무시할 수준은 못 된다. 영국은 소련에게 5,000대 이상의 전차와 5,000문 이상의 대전차포, 호커 허리케인 3,000대를 포함하여 7,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지원되었는데 여기에는 '대전기 그 어떤 독일기와도 대등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IX 1,100대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도 1500만 켤레의 군화나 전함 1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2000세트의 소나와 레이더 등을 지원하여 총 3.08억 파운드에 식량과 재료로 1.2억 파운드로 약 4.3억 파운드를 제공하였다. 당시 환율을 이용하여 달러로 환산하면 17.2억 달러로 적지만 본인들도 얻어먹는 처지에 미국이 준 것의 16%를 준 거다. 게다가 항공기의 경우는 질적으로도 우수했다. 물론 독소전의 환경은 저공에서 싸우는 일이 많아서 미국의 P-39 에어라코브라가 활약했지만 소련의 거지같은 전투기를 대신해서 고고도 요격기 수요를 채워준 건 영국 전투기들이다. 영미가 전투기로 못 쓸 물건이라고 깠던 P-39가 어지간한 소련 전투기보다 더 좋았다는 것만 봐도 소련의 항공기 기술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게다가 소련의 과급기 제조기술은 일본보다 못한 수준이라 제대로 된 고고도 전투기를 못 만들었다. 그나마 고고도로 올라는 가지는 MiG-3는 망작이고.

2.2. 소련

소련은 109억 달러(21%) 가량을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받았으며 이는 영국의 1/3이다. 그러나 이 계획으로 많은 득을 본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대전 초반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일에 비해 훨씬 높은 생산효율과 무기대여법 물자의 보급을 통해 결국 독일을 이기고 베를린을 짓밟는데 성공했다. 소련은 이미 무기대여법 혜택을 받기 시작한 1942년 1월에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차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꺾고 패퇴시켰다. 일단 영국에서 1941년 9월부터 연말까지 1,400대의 트럭과 600대 가량의 전차 800대 항공기 수만톤의 물자 등을 보급했다. 물론 나중에 받은 무시무시한 물량에 비하면 소수이긴 하다. 이후 스탈린의 반격이 주춤하면서 다시 나치와 소련은 공방을 이어가게 되지만 어쨌거나 나치 독일의 자랑거리였던 전격전은 1942년 1월에 이미 끝났고 이후는 완전히 소모전으로 돌입한 상황이었다. 소련의 광대한 국토도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는데, 나치 독일이 목표로 삼았던 유럽 러시아(우랄산맥 서쪽)의 면적은 인도 아대륙(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맞먹는 광대한 영토로, 이론적으로 수백만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1㎢당 고작 2, 3명의 병력밖에 없다. 중일전쟁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철도와 도시에만 수비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모스크바까지가 독일의 공세역량 한계였으므로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도 소련이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실 미국의 지원은 무기대여법이 미국 상원을 통과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Pre Protocol이라고도 하는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14만 톤의 고옥탄 항공유를 포함해 약 9,200만 달러의 물자를 지원한 것이 시작으로, 큰 지원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렸던 절망적인 상황인 만큼 가뭄의 단비 같은 도움이었다. 다만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이 전쟁 초반을 버텨냈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1941년 9월부터 시작된 렌드리스 항로가 1942년에는 독일의 방해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43년 2월 이후부터 제대로 보급이 이루어졌고, 기나긴 보급선인 이란루트-태평양루트를 통해 보급되었다. 또한 보급액에 있어서도 1942년 소련이 연합국에게 도움 받은 가치는 1,376,000,000달러, 1943년 2,436,000,000 달러, 1944년 4,074,000,000 달러였다. 무기대여법 총액 중 11% 가량만이 42년에 지원되었다. 43년 이후부터 45년까지 지원액이 89%를 차지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겨우겨우 독일을 막아냈으나 빈사상태에 놓여 있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이지 랜드리스 없이 독일을 막아낼 수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체로 소련은 무기대여법 없이도 독일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표적으로 독소전 초기 렌드리스가 미비한 시기 급격한 전선 붕괴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소련은 중현전차 대신 더 싼 경전차를 독일이 전간기 + 전쟁초기 동안 총 생산한 전차보다 많은 숫자를 그 짧은 시간 안에 대량생산함으로서 그 시기를 버텨냈다. 즉 주력전차 공백기간을 자력의 힘으로 버텨낸 것인데, 알다싶이 이를 자력으로 성공한건 미국[2]과 소련[3]밖에 없으며, 독일은 4호 전차 -> 판터 전차로의 기종변환에 실패해서 4호 (구축)전차를 전쟁이 끝날때까지 생산했고, 영국은 순항전차의 처참한 신뢰성으로 인한 반공백기(?)를 랜드리스 전차(셔먼, M3그랜트)로 버텨냈다.

그러나 무기대여법 없이 반격을 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아마 미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국 최악의 방어전쟁의 승자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무기대여법이 체결되고 소련과 미국은 가장 가까운 북극항로를 이용할 계획을 짰다. 대서양을 따라서 북극해로 진입한 후 소련의 북쪽 극지방을 따라 핀란드 동쪽 소련 영토였던 무르만스크 지역이 미국산 전시물자의 최종 목적지였다. 소련과 미국은 양측의 배를 동원하여 함께 전체 무기대여법 물자의 23%를 이 루트로 옮겼으나 계절적인 제한과 독일 해군의 공격으로 운송 중 전체 물자의 7%를 잃어버렸고, 이 수치는 대전 총합이므로 당연히 독일 해군의 유보트와 폭격기 세력이 그나마 건재하던 초기에는 소모율이 훨씬 높았다. 이 루트는 노르웨이의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를 거의 다 때려잡은 대전 후반부에는 큰 루트가 되었지 당장 급한 1941~1943년에는 주 루트로 삼기 힘들었다. 즉 그동안 전시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결국 2번째로 짧은 태평양 루트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 쪽도 태평양 전쟁이 터졌고 미국 배의 운송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영국과 소련이 함께 이란을 점령한 뒤에는 인도양의 이란에 보급품을 내려 육로로 소련에 수송하는 루트를 사용했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멀었다. 지구본이나 세계지도를 놓고 보자. 북아메리카 북부에 위치한 미국과 캐나다에서 배에 물품을 싣고 북대서양에서 출발하여 지구 반대편의 남대서양 최남단의 희망봉을 넘어서 다시 적도권으로 올라가 이란까지 갔다가 거기서 육로를 통해 북유럽에 가까운 동부전선으로 전시물자를 보낸다. 참 길기도 하다. 지구 정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의 최북단에서 최남단을 거쳐 다시 최북단으로 돌려서 물건을 배송하는 엄청난 여정이다.

그나마 1943년 중반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탈리아 전선이 생기면서 지중해에서 추축국 세력을 정리하고 나서야 수에즈 운하를 통해 무기대여법 물자 수송이 시작되고 최북단→최남단→최북단을 돌리는 뺑뺑이가 사라지면서 이전에 비해서는 그나마 가까워졌고, 이 루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될 즈음인 43년 중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 루트는 주로 미국이 직접 사용하여 전체 무기대여법 물자 중 27% 가량의 물자를 옮긴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일본은 한동안 서로 중립을 지켰고 일본은 1) 소련 선박일 것, 2) 비전투물자만을 수송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운송을 허가한다. 비전투물자에 한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루트를 통해 소련은 자신들 배로 전체 물자 중 50% 가량의 물자를 수송했다.

소련에 지원된 물자목록. 끝이 없는 글씨에 정신이 멍해진다.

식량 분야도 지원을 받았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나 콤바인을 지원해주고 비료까지 투입한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식량의 25%를 담당했다. 이 25%가 무시할수 없는게 전쟁중 군인은 평시보다 훨신 많은 열량을 소모 하니 군인에게 들어가는 식량을 줄일수 없으니 25%가 없었으면 민간인 아사자가 무시무시하게 나왔을 것이다. 모든 소련군의 4개월치 이상 전투식량[4],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막장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 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할 정도. 게다가 기호품도 공급했기 때문에 미국이 준 콜라를 마실 수 있어서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같이 콜라를 입에 달고 다닌 사람도 많았다. 위의 무기대여법 물자 목록 링크에 따르면 과일주스, 바나나, 사과 등 오만잡다한 것들이 다 올라와 있다. 소련은 독소전쟁 초기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하여 식량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공장이야 어찌저찌 우랄산맥 근처로 옮겨 어떻게든 굴릴 수 있다지만 식량은 특성 상 기후 및 토질이 맞아야 생산이 가능한데 시베리아는 농업에 부적합하다. 이러니 무기가 있다 한들 사용할 사람이 굶어 죽으면 생산한 의미가 없다. 게다가 평시가 아닌 전쟁 때는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무거운 군장을 휴대해야 해서 일일 칼로리 소모량이 4,000kcal는 기본이고 심하면 6,000kcal를 넘어가니 식량배급량을 줄이는 편법도 쓸 수 없다. 즉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무기대여법 물자마저도 초기를 견디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 24만5천개의 최신형 휴대용 무전기가 지원되었다. 이전까지 소련군은 대규모 공격은 몰라도 분대 단위의 소규모 전술구성 자체가 불가능 했었으나 이를 통해 가능해졌다.

해군쪽으로는 오마하급 경순양함, 타코마급 호위함, PT 보트와 각종 상륙정과 상륙함을 지원받았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 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가 꽉 잡았다.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409,526대의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 이미지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트럭 숫자는 병력 수에 비해 정말 적었으며 보급 운반을 트럭이 아닌 말로 했다. 스튜트베이커 트럭은 디트로이트 공업단지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툭하면 퍼졌던 소련의 Gaz 트럭보다 좋았다. 또한 야포 수송이 가능해져, 빠른 공세전환, 기동방어, 긴급 화력지원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로와 1,860량의 기관차, 11181량의 화차와 객차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이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 생산은 거의 없었고, 기존에 있던 차량과 시설을 보수할 목적으로 가뭄에 콩나듯 조금 생산한 것이 전부였다. 덤으로 석유도 2,599,000톤을 지급해서 모처럼 받은 수송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막았다.

공군에서는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항공기를 생산, 수리할 수 있게 많은 부품을 지원했다. 14,902기 항공기 엔진을 지원했다.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안습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미가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부대 소속이었으며, 실제 알려진 전과도 엄청난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미제 전투기로 올린 최다 격추수 보유자들도 진위여부는 의심스럽지만소련 파일럿들이다. [5]

미국이 준 약 1천 4백만켤레의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다.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나치 독일이 온 유럽의 공업력과 자원을 다 가지고도 공업효율이 개판이라 생산성이 그야말로 형편없던 것도 한 몫 한다. 미국 금속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 엔진을 달고 미국이 지원해 준 항공유로 띄워,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 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개박살냈다. 뭐야 이거 그냥 미국 전투기잖아

그리고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된 물자 중 "아 뭐 수량도 많지 않고 성능도 별로였어."라고 가장 저평가를 받는 병기도 의외로 호평인 경우가 많았다. 일단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으며, 야포 및 박격포의 경우에도 96,000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다. 이외에도 기관총 131,600정, 포탄 325,784톤 당연히 기존 소련 포탄은 사이즈가 안맞으니까.,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 역시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발렌타인 경전차의 경우 소련 요청으로 추가 생산을 했을 정도이며[6], 일부 영국산 전차를 제외하면 자국산 전차에 비해 거주성이 좋고 화력 역시 소련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진 않았다. 그리고 처칠도 장갑이 튼튼하다는 점, KV-1과 대등한 위력의 주포를 갖추고 있다는 점등을 들어 나쁘지 않은 평을 했다. 소련은 무기대여법 전차 일부 구성품이나 콘셉트를 그대로 베껴서 자기네들 전차에 적용하기도 했다. M4 셔먼 전차도 소련군은 '장갑 괜찮고 속도도 나름대로 빨라 추격전에 좋고 고장도 잘 안 나고 화력도 좋다'고 후한 평가를 했다. 덤으로, 의자에 쓰인 인조가죽의 제질이 훌륭하여 셔먼 전차병들은 전차가 격파되면 의자 가죽부터 뜯어냈다고 한다. 반면 차체 높이가 너무 높아 넓은 평지에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과(반대로 관측하기 좋다는 장점이 되기도 했으니 완전히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궤도 폭이 협소해 험지돌파 능력이 모자랐단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소련 병사들이 서방 전차를 좋아했던 건 기계적 신뢰성과 편의성이 높았고 대구경 화포를 중시한 소련전차들과 비교해 상대적 저구경이라 더 중요도가 낮은(반대로 위험도도 낮은) 전장으로 보내거나 대전차전 등에 안끌려 간다는 점이 좋았던 것.

소련군은 셔먼 전차를 대전 말기까지 베를린 포위전, 빈 포위전 등 독일 본토 공략에 요긴하게 써 먹었다. 그냥 셔먼 쓰던 부대에 계속 보급해준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소련 지휘부도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쓸만한 장비니까 계속 보급했을 것이다. 서부전선의 미군은 셔먼 전차로 독일군의 6호 전차 티거와 5호 전차 판터에도 맞서야 했으니 장갑과 화력이 약하다고 징징거렸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 등에 맞설 전차로 자국산의 IS-2 같은 전차들이 있었기에 셔먼의 장갑과 화력에 만족했다.

일부 소련제 무기가 미국에서 생산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모신나강 소총이 미국에서 생산되어 배를 타고 건너가 러시아제 모신나강들과 섞여 배치되었다. 소련군들은 망치질 없이 작동하기 힘들었던 자국산 소총이 갑자기 좋아지자 "뭐지...?"했고 총기수입(청소)을 위해 개머리판 보호대를 빼자 나타난 Made in USA를 보고 "그럼 그렇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 생산된 모신나강은 아직도 미국 서플러스 총포시장에 10개 한박스 3~400달러에 팔리고 있다.(...) 러시아제와 구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미제 모신나강은 나무가 더 짙은 붉은색이며, 탄젠트형 가늠좌가 야드 단위로 적혀 있고, 나사 대부분이 일자나사인 러시아제와 달리 더 튼튼한 십자나사이며, 무엇보다 각인이 영어로 써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소련이 전차나 항공기를 생산하지 못 하던 국가는 아니었다. 이미 소련은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으로 전차 부분에서는 연합국은 물론 독일을 능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전차나 항공기를 완전히 렌드리스에 의존하던 것은 아니었다. 주력 전투기 엔진은 소련 엔진을 가져다 썼고 렌드리스로 받은 항공기에 소련 엔진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는 기계적 신뢰성이 부족해서 렌드리스 받은 전차들을 무고장이라면서 좋아했다. 또 소련의 항공기 기술은 일본보다 뒤떨어졌다.

소련은 대전 내내 물자 더 보내라고 미국에 요청했고 심지어는 미국도 소련이 원하는 물량을 보내지 못한 것도 많았는데, 소련이 요구한 것 중에는 핵무기 개발용 우라늄 물질까지 있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법으로 온 원조품들,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를 통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군사, 산업 부분에 써먹었다. 15,000명의 소련 관리와 기술자들이 미국의 공장과 군사시설을 방문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완전히 짓밟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또한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몰빵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구리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실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부수기재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하나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부족으로 78옥탄가 밖에 안 되는 저등급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옥탄가의 고등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했으며 나중엔 아예 4개 플랜트 시설을 제공했다. 그것도 철로나 연료탱크같은 부수기재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면서 말이다. 상기 언급한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로서만 아니라 소련 석탄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던 돈바스 지역 같은 핵심 광업 및 공업의 중추이기도 했다. 이런 알짜배기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넘겨버린 소련이 말 그대로 무주공산인 우랄 산맥에서 자력으로 독일의 공세를 막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알짜배기 땅을 다 먹고도 여러 삽질로 생산성이 한참 떨어진 나치 독일도 대단하고. 실제로 차트를 보면 대전 중 물자 생산량은 연료를 제외하면 석탄, 철광석, 알루미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련이 독일보다 열세했다. 그런데도 병기 생산량이 밀리는것은 무기대여법과 나치 독일의 형편없는 생산관리 역량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안다. 사실 그 전이나 후나 러시아인이 영어를 잘 아는 편은 아닌데, 영어가 로마자를 쓰는 것과 달리 러시아어는 키릴 문자를 쓰고, 러시아어 자체도 영어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으며, 로마자를 읽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선 프랑스어도 많이 쓰던 귀족=장교들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으로 많은 수가 죽고 쫓겨났으며 일부 공산당을 지지한 구 귀족 출신 소련군 장교들도 곧 등장한 강철의 대원수에게 대숙청으로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퍼주면서 포장 박스, 사용설명 매뉴얼까지는 러시아어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배울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에서 쓰려고 제조한 물자를 수출도 아니고 말그대로 공짜로 퍼 주는 상황이었으니 포장을 바꾸는데 또 돈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니 당시 러시아인들은 받은 엄청난 물자를 뭔지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 잘못 쓰다가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7]

2.3. 중국(중화민국)

중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 등으로 지원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 초의 국부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고문관들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하고, 30개 사단 중 8개만 무장이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편제에 맞게 구식 무기들로 채웠는데, 그나마 이 8개도 포병, 공병, 화학 장비와 군마,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들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 게 당시의 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이었다. B-29의 초기 작전의 상당수 소티가 폭격임무가 아닌 중국을 향한 무기 수송에 할당되었다. 폭탄 적재창에 폭탄 대신 구호품/군수품을 적재한 것. 또한 중국에 배치된 미군부대(주로 공군)에 대한 군수품 수송에도 할당했다.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기술적으로 수십 톤짜리의 MBT 전차를 공군의 전략 수송기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된 것도 베트남 전쟁 이후이고 그것도 1회에 고작 1-2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류나 조금 줄 수 있었고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다 주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으로 인식되는 티베트 고원의 첩첩산중의 험악했던 수천 m의 산들과 악명 높은 계절환경에서 많은 불시착이 발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은 전후에 버뮤다 삼각지대에 버금가는 미스테리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낼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조지프 스틸웰이나 클레어 셰놀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 중 셰놀트는 장제스와 매우 원만한 관계였고 중국군에 협조적이었지만, 스틸웰이 문제였다. 그는 중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넘기라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고 심지어 중국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며 시종일관 장제스에게 떽떽거리던 양반이었다. 스틸웰과 그의 군사고문단은 중일전쟁의 양상이나 중국군의 전술[8] 및 적인 일본군의 능력은 무조건 폄하하면서 보급받은 것을 자기 휘하 부대에 꿍쳐놓고 버마 탈환 준비에나 힘썼다. 이 때문에 열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 수백 만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반면에 미군 안에서는 국부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 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라고 중국을 깔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미국/영국은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대표적 실책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대만 공격론이 쑥 들어가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러운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명을 저세상에 보냈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전에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군 웨이브를 맞고 백기를 들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쩌둥은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정작 장제스는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고, 국민당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약올렸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임인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이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은데다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심지어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3. 전후 상황

사실 이 계획은 공짜가 아니다. 전부 빌려준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지원품을 직접 돌려주던지 아니면 돈으로 환산해서... 그러나 전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됐다. 이것들은 10분의 1 떨이로 연합국에 넘겼는데, 엄연히 대가가 달린 만큼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보통 이자율 2%에 50년 상환 기한을 주었기 때문. 당시의 금본위제도로 연리 2%면 싼 이자는 아니었다. 심지어 적대국 소련조차도.

그러나 1차 대전 때와는 달리 미국이 떼돈은 커녕, 손해보는 장사였다. 제값으로 받은 게 거의 없기 때문. 제값을 받을 수도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전쟁 피해 복구도 벅찼던지라. 위에서 무기 같은 경우 엄연히 빌려주는 거였던지라 전쟁 끝나고 무기를 돌려받아야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새로 생산한 무기도 창고에 넘치는 판에 연합군이 쓰던 중고무기는 돌려받을 필요가 없어서 거의 헐값만 받게 된다. 당장 영국부터 군수물자들을 10% 가격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미국 입장에선 원가는 커녕 사람들 인건비도 안 나온다.

루스벨트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때 '무기를 빌려준 다음 다시 그 무기를 돌려받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 때 나온 비유가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번지기 전에 호스를 빌려줘야 한다는 것. 한편 반대편은 이 법안을 '호스가 아니라 껌을 빌려주는 것'에 비유해 '씹던 껌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쟁 치르고 나면 당연히 무기들 꼴이 말이 아닐텐데 그걸 돌려받아서 뭐하느냐는 뜻)'며 비난했다.그렇다 해도 일단 사람살리고 봐야지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원조가 끊기자 미국에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한 게 파운드화로 대략 11억 가까이 됐다. 여기에 무기대여법은 어디까지나 전쟁 끝나고 나서는 다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 빚도 추가.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비밀창고에 있던 금괴로 땡처리하고 입을 씼었다고 알려졌다. 루머같지만 사실이다. 1942년 영국의 HMS 에딘버러호가 미국에 보내는 금괴 4.5톤을 나르는 중 독일 잠수함에 침몰당했고, 이 금괴는 1981년, 1986년에야 인양되었다. 1948년에 소련이 1.7억 달러로 전부 변제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미국은 전쟁중 소련에 보낸 물자 값어치 중 전쟁 손실 예상 50%를 공제한 가격의 10분의 1인 13억 달러를 요구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1951년에 8억 달러를 변제하라고 요청하자 소련은 3억 달러만을 변제하겠다고 하자 또 파토가 난다. 결국 1972년에 소련이 7.2억 달러를 갚기로 미국과 최종 합의한다. 그런데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국가,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9] 그러나 1993년 4월 2일 러시아가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하여 무기대여법 관련 채무는 전부 러시아가 책임지게 되었다. 2000년에 6억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 21일에 전액을 변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파리클럽을 통해서 소련 시절 서방에 졌던 빚을 전부 갚은 것이다.

소련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 1945년 기준 113억 달러치의 물자를 소련에게 랜드리스.
  2. 1947년 미국은 소련에게 영국의 가격치(영국은 10% 가격으로 렌드리스 받음.)를 적용해서 고작 13억 달러(!)를 갚으라고 요구.
  3. 소련은 1.7억 달러 정도는 갚아줄 수도 있음! 하고 반응.
  4. 미국은 소련이 30년간 땡깡부리는 걸 보다 못해 닉슨 때 "7.2억달러 정도로 갚아라." 고 합의를 봄.
  5. 7.2억달러를 3번에 나눠 갚기로 합의 본 다음 1973년까지 4.8억달러로 두번 갚음.
  6. 다시 땡깡. 2006년에 파리클럽 채무협상을 통해서 완납.

계산
  1. 1945년까지 $113억치 물자 받음
  2. 1973년 기준으로 $269.8억 인데 여기서 $4.8억 갚아서 $265억 됨.
  3. 남은 금액은 2006년 기준으로 $1222.4억 인데, 여기서 다시 $2.4억 갚아서 $1220억 달러 됨.
    (물가상승률 환산 기준. 순수 원금만 적용한 것이니 단순히 참고만 할 것.)

그래서 2006년 기준 $1249억 중 $29억 갚은 걸로 완납. 그야말로 소련 입장에선 거의 공짜로 받아먹은 셈이다. 사실 말이 공짜지, 2차대전 당시 민간인만 2천만이 죽어나간 참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독일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꽂은 전적을 생각하면 이미 수많은 인민의 핏값으로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도 남은 셈이라, 미국도 소련을 외교적으로 파렴치한 취급하지는 않았다.

중화민국은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쫒겨 나가서 갚을 여력은 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그냥 미국이 빚 받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사실 여긴 빚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의 수교 후에도 대만이 생존만 해서라도 중국에 대한 지리적 이점을 차지하고만 있어도 미국의 대중전략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가 살아 있는 셈이므로 주한미군, 주일미군 기지와 함께 중국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유지만 하고 있어도 대중전략에 큰 도움이 되는 셈. 그 외에도 무기 대여를 받은 국가들은 전쟁 이후 물자 지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대금 지불 대신으로 미국에게 병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지급하거나, 기지 부지 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다. 허나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 선전포고 안 했으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을 생각해 보면...

4. 의의

당시 강대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무기대여법으로 들여온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무기를 오래 쓰다 보니 길들여져서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런저런 마찰이 있어서 7.62x51mm NATO탄과 관련된 삽질등이 있기는 했다.그리고 SA80A1의 신뢰성이 시궁창에 처박히는 데도 기여했다.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자금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했으며, 무기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미국 거시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의 윈윈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정히 말하자면 미국이 조금 더 많이 이득이었고.사실 엄청난 개이득 그 외에도 이런저런 기술 교류도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이거다: 만약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끝났을까? 나치가 워낙 꽉 막힌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미국이 너무 사기였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력으로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공장설비를 포함해서 뜯어갈 수 있는건 모조리 뜯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공장은 뜯어간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뭐, 석탄은 탄전에 불을 붙여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탄전이 수백 년간 지속해서 타기 때문에 인근 지역은 수백 년간 못 쓰는 땅이 된다. 물론 독소전쟁에서의 독일은 그런 걸 신경쓸 리가 없긴 하지만...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 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 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한다고 마구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닥치는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 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일본도 비숙련공을 동원했는데, 문제는 소련과는 달리 규모의 경제가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숙련공의 노하우에 기대해야 하는 정도가 소련보다 더 큰 데다가 결정적으로 숙련공은 전쟁에 밀어넣고 비숙련공은 공장에 밀어넣는 맛이 간 방법을 써서 갈수록 질이 좋아지기는 커녕 오각형 너트가 나올 정도로 질이 더 형편없어졌다.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리츠 토트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개입해서 생산체제를 혁신하면서 무기생산량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미 연합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긴 1944년에 접어든 시점이라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44년이면 이미 점령지는 다 뺏겨서 지하자원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물자의 운송과 생산이 방해받던 시점인데도 오히려 무기생산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슈페어 군수장관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독일의 군수경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쉰들러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들이 모조리 불합격 판정을 받는데도 계속 생산해서 독일군에 납품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실제 당시 독일은 품질에 상관없이 모든 군수기업에 일괄적으로 10%의 이윤을 보장하는 병맛같은 시스템이라서 그런 해괴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 당시 독일경제를 주무르던 재벌들의 환심을 사고 현실적으로 빠른 재무장을 위해선 품질 이전에 일단 대량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입한 시스템인데 이걸 총력전 상황에서도 계속 끌고 가다가 엉망이 된 것이다.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 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적인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의 물량에 밀린 독일이 패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 호스를 제때 빌려주어서 우리집까지 불이 옮겨붙지 않게 된 셈이다.물론 뜻하지 않게 현관에 불이 붙긴 했다.

5. 추축국은?

추축국의 큰형님인 독일 역시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원유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동계장비는 전쟁 내내 핀란드에서 몽땅 공급했다. 왜 독일이 북유럽으로 올라갔겠는가.

보급선의 경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 준 덕분에 수월한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독소전쟁 초기 독일의 보급선은 동맹국들이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으며 보호해주고 있었다. 독일이 동맹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도 패전했을 꺼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제해권도 연합군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급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라프 체펠린을 양도받으려고 했을 때는 독일이 주긴 하겠는데 알아서 가져가라는 식으로 나와서 어떻게 가져올까 머리를 굴리다 결국 포기했고, 티거를 구입하려 했을 때도 가져올 방법이 없어서 이미 계산까지 끝내 놓고 (독일에게 다시 대여해 준다라는 명목으로 돈을 일부만 도로 받아낸 뒤)포기했다. 또한 남방으로 내려간 이유 중 하나가 석유인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족한 보급을 점령지 및 식민지를 쥐어짜서 충당했는데,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커서 문제가 되었다.


[1] 이 구축함들중 9척을 제외한 대부분은 영국이 선단보호 및 대잠초계 임무에 투입하였다. 9척은 캐나다 해군에 재공여되었다. 캐나다는 이구축함들을 매우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2] 셔먼E8로의 기종전환[3] T-34-85로의 기종변환때는 확실히 미국의 랜드리스 효과를 보았다.[4] 이제 작전 지역에서 밥을 먹기 위해 원대복귀해야 된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든 것이다.[5] 소련의 전과 과장은 악명이 높고 그게 아니라도 항공전 전과는 과장되기 쉬우니 소련의 항공전 전과는 특히 걸러서 들어야 한다. 소련 지휘관들은 서방군 수송기는 쓸만하지만 전투기는 성능이 나쁘다고 깠다는 의견도 있다.[6] 이는 소련측 분류로 보인다. 영국은 발렌타인을 보병전차로 분류하였다.[7] 비슷한 예로 한국군은 1960년대 베트남전에서 거의 모든 물자를 미국에 지원받았다. 그 중 대인 지뢰/폭탄인 크레모아를 받았는데, 적 방향으로 설치하라고 쓰인 'FRONT TOWARD ENEMY' 라는 영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반대 방향으로 세팅해 놨다가 부대원 30여 명이 전멸당한 사례도 있다. 도저히 웃지 못할 '실화'이고 이런 경우가 한두번도 아니고 상당히 많았다. 견디다 못한 한국군도 미군에 지원물자를 한국어로 기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군에선 군납물자 기입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없다고(사실 군납품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베트남에 있는 미군사령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납품을 보급하는 건 미 국방부니까) 매뉴얼만 한국어로 써서 보냈는데 당연히 이런 종이 매뉴얼 쪼가리는 정글인 베트남에선 비에 젖어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결국 한국군들은 선임들이 후임들에게 목숨과 맞바꾼 노하우를 구두로 전승하는 식으로 저 영어 단어만 죽어라 외우고 익히는 식으로 적응해 나갔다.[8] 후방 유격전 및 일본군의 공세에 맞선 후퇴 후 분산포위 전술을 말한다. 우선 유격전은 거대한 일본 점령지의 후방에서 소모전을 강요하고 일본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분산후퇴-분산포위 전술은 보급이 빈약한 일본군을 공세종말점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분산된 병력을 한시에 일거이 집중시켜 포위망 안에 들어온 일본군을 사방에서 두들겨대는 전술이었다. 일본군의 상대적으로 막강한 화력에 중국군 전체가 녹아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군이 4년간의 전쟁을 통해 수립했던 효과적인 노하우였고, 반신불수가 된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병력의 집중운용과 정면 공격 등의 정석적 교리를 중시했던 스틸웰의 미 군사고문단은 중국군이 이러한 전술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열등한 쿨리들이 기본도 모르고 내빼기만 한다고 폄하하기 바빴다.[9] 1991년 12월 4일 "외부 공공 부채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합자산 승계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