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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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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제6대 성 미카엘 신학원장'''
루번 아처 토리 3세
戴天德 | Reuben Archer Torrey III}}}'''
파일:대천덕 신부.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colcolor=#000,#ddd>1918년 1월 19일
중화민국 산동성 제남
사망 2002년 8월 6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재임기간 제6대 성 미카엘 신학원장
1957년 12월 6일 ~ 1964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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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colcolor=#000,#ddd>북중국미국인학교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연경대학
데이비슨 칼리지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남 대학교 (성직과정[석사] / 졸업)
하버드 대학교
캔터베리 중앙신학대학 (졸업)
가족 아내 제인 그레이 토리 사모[2], 슬하 1남[3], 2녀
부제서품 1945년
???성당
미들턴 스튜어트 반웰 주교 주례
사제서품 1946년 2월 2일
???성당
미들턴 스튜에트 반웰 주교 주례
}}}}}}}}}

1. 개요2. 생애3. 저서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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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번 아처 토리 3세(戴天德, Reuben Archer Torrey III)는 제6대 성 미카엘 신학원 원장신부이자, 성공회 대전교구 소속의 수도원인 '예수원'의 설립자 겸 초대 원장신부이다.

2. 생애

1918년 중화민국 산동성 제남에서 장로교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중국 북부와 일본치하의 조선에서 보냈다. 북중국미국인학교, 평양외국인학교 등에서 수학한 후 연경대학에 진학하였으나, 1935년 도미하여 데이비슨 칼리지에서 신학사학위를 취득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진학하기도 한다.

이후 철강회사에 취직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선원생활을 하기도 하다가 서와니 대학교(University of the South)[4]에서 성직과정(석사과정)을 졸업하고 1945년 부제품, 1946년 사제품을 받고 조지아교구 내 성당 세 곳(성 안드레아 성당, 성 키프리안 성당, 성 요한 성당)에서 사목했으며, 특히나 성 요한 성당에서 사목하던 때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57년 성 요한 성당에서의 사목을 마치고 한국으로 오게된다.[5] 한국에서 맡게 된 일은 바로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카엘 신학원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당시 신학원의 상황을 보면, 신학원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청주로 임시이전해 있었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그 곳에서 운영되어 오다 그마저도 1954년 원장신부였던 윌리암 퍼셋트 신부가 본국으로 귀국한 뒤 휴교중이었으며, 제21회 교구의회('56. 6.)에서 의결된 사항에 따라 현재 성공회대학교 일대 부지를 구입했을 뿐이었다.[6]

이윽고 1957년, 대천덕 신부는 내한하였고, 그해 12월, 신학원 건물들의 축성미사가 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의 집전으로 봉행되었으며, 대천덕 신부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원장 재임기간 동안 성직지망생들에게 공동체생활, 자급자족에의 노동, 기도와 영적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당시 한국 성공회가 고교회적 전례 일색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적용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7]

1964년 8월 4일, 안식년을 사유로 원장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후임 원장신부로 부임한 리차드 럿트 신부[8]가 부임하는데, 럿트 신부는 당시 한국 성공회의 풍토에 맞는, 대천덕 신부가 원장재임기간 동안 강조했던 것들과는 대척점에 가까운 전례적인 교육에 방점을 두게 되는데, 위에 언급한 바를 상기해 보면 신학교육에의 대천덕 신부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식년을 보낸 후,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건립하게 된다. 이 후 예수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를 줄이는 여러 사회적 활동을 진행하였다.

2002년, 갑작스러운 뇌출혈 증세로 수술을 받고 입원하였다. 몇 개월간 입원 치료와 요양을 거쳤지만 결국 8월 6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유해는 예수원에 안치되었고 생전 본인의 뜻에 따라 별도 묘지는 설치되지 않았다.

유언은 "토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외치십시오." 이다. 병상에서 잠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문병을 온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고 한다. # 대천덕 신부의 묘비에도 이 유언이 적혀있다.

한동대학교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옥한흠, 오정현, 하용조, 조용기, 이동원, 김회권, 강원용, 이영훈, 송태근, 박영선 목사 등 한국의 여러 잘 알려진 목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 저서

  •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1982)
  • 나의 하나님(1987)
  • 우리와 하나님(1988)
  •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2(1991)
  •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3(1992)
  •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4(1993)
  •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5(1998)
  • 토지와 경제정의(2003)

4. 둘러보기

파일:대천덕 신부.jpg
파일:성공회대학교 UI.svg 역대 성공회대학교 총장
성 미카엘 신학원장[청주] 성 미카엘 신학원장
제5대 윌리암 헨리 카 퍼셋트 신부 제6대 루번 아처 토리 3세 신부 제7대 세실 리차드 럿트 신부

[석사] 석사과정으로서, 졸업하면 부제고시 응시 자격과 함께 석사학위가 수여된다.[2] Jane Grey Torrey, 한국명 현재인, 1921. 2. 4. ~ 2012. 4. 6.[3] 루번 아처 토리 4세, Reuben Archer Torrey IV, 한국명 대영복, 북미 복음주의 사도교회 소속 사제[4] 미국성공회 산하 스와니관구 예하 26개 교구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대학교이다.[5]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대천덕 신부는 본래 조지아교구(미국)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성공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되었다는 사실이다.[6] 이 곳은 유한양행의 회장이었던 유일한 선생의 땅이었는데, 호주에서 온 한 신자의 소개로 토지매입이 성사되게 되었다. 유일한 회장은 50에이커의 구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한국교구장이었던 존 데일리 주교는 5에이커만 구입하였다. 당시 대학설립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터이다.[7] 실제로 존 데일리 주교의 교구장 재임기간 동안 전례력에 종교개혁기념일이 표기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 고교회적 전통이 유지된 것을 보면, 근 70년 가까이 지켜온 신앙이 하루 아침에 바뀌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혹자들은 이때부터 한국성공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8] Cecil Richard Rutt, 한국명 노대영. 성 미카엘 신학원 원장신부로 재직 중 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의 뒤를 이을 대전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어 사목하다가, 1968년 제2대 대전교구장으로 승좌한다. 후에 영국으로 전격발령되어 트루로교구 보좌주교('74~'79), 제4대 레스터교구장('79~'90)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천주교에 귀의하여 교종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몬시뇰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