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2 22:51:11

레오니다스 포크

<colbgcolor=#003458><colcolor=#fff> 미국 성공회 초대 루이지애나 교구 주교
레오니다스 포크
Leonidas Polk
파일:1000143963.jpg
출생 1806년 4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랄리
사망 1864년 6월 14일 (향년 58세)
조지아주 콥 카운티
학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중퇴
육군사관학교
버지니아 신학교
복무 미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복무 기간 1827년
1861년 ~ 1864년
최종 계급 중장
참전 남북전쟁
묘지 크리스트교회성당

1. 개요2. 생애

1. 개요

미국의 군인이자 성공회 주교.

2. 생애

노스캐롤라이나주 랄리에서 스코틀랜드-잉글랜드-위그노계 부농인 윌리엄 포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다니다가 기존 종교였던 개신교를 버리고 성공회에 입부해 세례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27년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1]

하지만 4개월 만에 제대하고 버지니아 신학교에 입학해 리치먼드에 있던 리치먼드 무어 주교의 보좌로 일했다. 1830년 집사직을 서품받을 예정이였으나 견진성사를 받은 경험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급히 견진성사를 받고 집사직을 서품받았다. 1832년 테네시주 모리 카운티에 성당을 건축하고 미사를 열었다. 한편으로 농장을 구입해 100명이 넘는 흑인 노예를 소유했다. 1841년 루이지애나 교구의 대주교가 되어 20년이 넘게 재직했다.

평소 전쟁때 무기를 드는 것이 신념이라고 밝혔고 남북전쟁 발발 전 미국 성공회에서 분파해 미국 남부 성공회를 세웠다. 전쟁이 발발하고 사관학교 동기였던 데이비스에게 다른 동기인 시드니 존스턴을 미시시피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편지로 썼다. 하지만 존스턴은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어 데려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에 데이비스는 포크를 초청해 로버트 E. 리와 만찬을 가지며 제2군관구사령관를 포크에게 제안했고 처음엔 난색을 표했으나 받아들였다. 이에 소장으로 임명되어 미시시피 전역 제2군관구사령관이 되었다.

테네시의 의용군을 남군으로 편입시키라는 임무를 받았고 당시 군관구소속 기디언 존슨 필로 소장은 이 낙하산 인사에 반발했다. 미주리 전역에서 필로는 포크의 지시를 불이행했고 이에 더 이상 항명하면 보직해임하고 리치먼드로 보내버리겠다라는 말을 남기자 굴복했다. 이후 켄터키 전역에서 활약하고 미시시피강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다만 샤일로 전투에서 브랙스턴 브래그와의 불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1862년 중장으로 진급해 테네시군 제1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스톤스강 전투에서 북군의 매복으로 패배했고 털라호마에서도 윌리엄 S. 로즈크랜스의 병력에게 패배했다. 치카모가 전투에서 D. H. 힐과 함께 우익을 담당했고 브래그가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야밤이라 전령들이 길을 잃어버리고 공격준비가 되지않고 포크 임의로 공격지시를 내리지도 않아 4시간 정도 지연되어 브래그는 화가 나 포크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1군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864년 애틀랜타 전역 당시 테네시군 제3군단장직으로 임명되어 매리애타 인근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북군의 포격을 맞고 전사했다.


[1] 당시 동기로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제퍼슨 데이비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