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1 00:18:59

대한제국군 징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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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식 군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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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1881 ~ 1882)
교련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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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1882 ~ 1894)
친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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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1895)
훈련대, 시위대, 신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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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1895 ~ 1897)
친위대, 신설대, 진위대, 지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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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1897 ~ 1900)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지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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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1900 ~ 1905)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호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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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1905 ~ 1907)
시위대, 징상대, 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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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1907.4 ~ 1907.8)
시위혼성여단, 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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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 이후
(1907 ~ 1910)
근위보병대, 근위기병대


1. 개요2. 설명3. 기타

1. 개요

徵上隊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대한제국 때에 평양의 진위대(鎭衛隊)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군대를 말한다.

2. 설명

고종은 집권 기간 대부분을 서울에서 체류했으며 서울의 안보에 가장 집중했다. 그래서 중앙군대한제국군 시위대대한제국군 친위대에 주요 병력과 자원이 집중되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지방군인 대한제국군 진위대는 거의 보병부대로만 편성되었다.[1]

진위대 중에서도 안보적으로 러시아청나라와 인접한 평안도함경도의 경우 진위대 3개 연대가 배치되었다. 나머지 6개 도에는 같은 수의 3개 연대가 배치되었는데 부대 실제 편제 규모는 북쪽의 3개 연대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평안도엔 2개 연대가 배치되었고 평양에만 3개 대대가 설치되었는데, 이중 1개 대대는 수시로 서울로 불러들여 시위대와 친위대의 보조 병력으로 활용하였다. 그래서 1890년대말부터 징상대대 관련하여 언급이 등장한다.

1903년에 승정원일기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징상대의 사병은 경군인 원수부, 시위대, 친위대, 헌병대와 함께 급여 인상을 하였다. #

1905년 일본의 입김에 의해 1차 군축이 이뤄지면서 시위대 1개 연대가 폐지되고, 친위대는 완전히 폐지됐고 진위대도 6연대 18대대에서 8대대로 감축되었다. 경군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자 지방의 진위대 병력을 서울로 데려왔는데, 이 시기의 징상대는 평양진위대 외에 수원진위대 등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무렵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징상 1-3대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1 #2 #3

시위혼성여단이 1907년에 생기자 징상대를 중심으로 사라진 시위대 2연대가 복설되었다. 이중에서 시위대 2연대 1대대는 남대문 전투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장교 전사자가 전원 이 대대에서 나올 정도로 장교들의 참전 비율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부대가 해체되면서 징상대도 소멸한다.

3. 기타


[1] 이는 오늘날에도 전방사단과 향토사단, 동원사단의 병력 수준에서도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