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2 10:17:13

농노제

농노에서 넘어옴
1. 개요2. 농노의 부담/의무3. 쇠퇴4. 재판(再版)농노제5. 오해6. 소작과의 차이점7. 영주의 권리와 책임 & 농노의 의무8. 농노와 노예의 차이점

1. 개요

Serfdom / 農奴制

봉건제도가 널리 퍼진 유럽 중세시대에 생긴 통치제도다. 서부 및 남부유럽에서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거의 사멸하지만, 동유럽은 '재판농노제'라고 하여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로 유럽 처럼 봉건제 국가였던 에도시대 일본 또한 전체 인구의 약 80% 정도가 농노였었다. 일본의 농노제[1]

당시의 농사기술은 한 해 경작을 하고나면 땅을 2~3년간 묵혀두는 윤작제였기 때문에 자기땅만 가지고선 독자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영주의 장원을 경작해주는 대신 작물의 종자나 식량을 지원받고 자기 땅을 경작하기 위해 가축과 농기구 등을 빌렸는데, 농노는 장원에 크게 의존하는 종속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영주노예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놓여졌다. 때문에 번역을 할때에 농노제도 아래의 농민인 Serf들은 농민임과 동시에 노예의 속성을 지녔다고 하여 '농노'라고 부른다.

농노들은 토지소유자인 영주에게 사실상 종속되어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하여 영주의 땅을 벗어나면 안되었고, 장원을 경작해주면서 또한 영주들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또한 영주가 전쟁을 치르게 되거나, 건축등의 대형작업을 하게될 경우, 농노들은 부역으로서 강제로 그 작업에 참가해야만 했다. 또 장사를 한다거나 공업일을 하는것도 허가받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곡식을 제분하여 빵으로 만들어 먹기 위해선 영주들이 직영 혹은 세금을 받고 영업 허가를 내어 준 방앗간과 제빵소를 유상으로 이용해야만 하였다. 농업이나 목축 이외에 허가받지 않은 사냥은 엄격하게 금지됐는데, 농노들이 무분별하게 사냥을 해대면 영주의 유흥거리인 사냥을 할 들짐승들이 준다는 점도 있고, 크게 보면 영지 내 생태계를 아작내 흉작 등으로 인한 예비 식량자원 확보가 불가능해진다는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땔감 조달용으로 마구 숲을 벌목해대는 행위 즉 도벌을 막기 위해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들판에서 족제비나 그물 같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한 토끼 사냥 등은 밭을 망치는 유해 조수를 박멸하고 농노들의 소소한 부수입을 통해 불만을 부분 해소하는 차원에서 눈감아주거나 대놓고 허가했다. 사냥이 허가된 이들은 소수의 전문 사냥꾼으로, 대신 이들은 영주의 사냥터 내 개체 수 관리와 경비, 영주의 사냥 시 수행원 역할, 전시에는 평시 연마한 궁술 및 사격술을 활용한 정예 보병으로의 소집과 같은 의무를 졌다.

농노는 곡물은 맛이 없는 호밀만 먹을 수 있었으며[2], 그 덕분에 맥각 중독에 시달렸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제빵소 화덕을 이용하는데 사용료가 들기 때문에 그나마도 호밀빵명절에나 먹고, 보통은 을 쑤어 먹었다. 고기는 아껴 먹어야 했기에 돼지고기는 대부분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키울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도축해 염장고기를 만들어 겨울에 집중적으로 소비했다. 달걀 등은 이 시대의 닭은 현재만큼 알을 많이 낳지 않아 영주에게 바칠 물량이 대부분이라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양은 적었다. 그나마 영지 내에 이나 개천, 호수가 있다면 민물고기 생선을 맛볼 수 있었고, 해안에서 가까운 영지 거주자라면 당시 대량으로 잡혀 사실상 빵 대용품에 가깝게 내륙에도 꽤 팔리던 말린 청어 등은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예속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중세 후반에 들어 영주에게 돈을 내고 자유민의 신분으로 해방되거나, 아니면 도시로 도망처서 1년+하루 동안 잡히지 않으면 자유민으로 인정되었다[3]. 독일 같은 경우 발트해 동쪽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해 일손이 많이 필요하자 농민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로운 신분을 약속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으며 가혹한 농노제와 세금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집단으로 반발하여 농민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농노의 대접은 분명 나쁘긴 했지만, 이들은 종전의 노예들과 달리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영주의 허가가 필요하긴 했으나 일단 자기 짝 찾아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각 영지에서 수백년간 이어져 온 관습법가톨릭 교리가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오히려 산업혁명시기가 되자 농노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메꾼 노동자들은 농노만도 못한 삶을 살기도 했고, 전통적인 관습법을 대체한 새로운 법들이 생기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 동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등이 생겼다.

2. 농노의 부담/의무

고전 장원제를 기준으로 한 농노의 의무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강제적으로 영주 직영지를 경작해야 한다. 말 그대로 다 해줘야 한다. 직영지의 경지를 갈고 파종하고 수확하고 탈곡하고 건초를 만들고 거두며, 포도원이있으면 가지치고 덩굴매고 포도를 따 줘야 한다.
  • 부역은 부과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으나 정기 부역이 일반적이었다. 보통 1주에 3일을 영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
  • 부역 자체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이 포함된다. 생산물 운반,직조 재봉,밀가루빻기,양조 등등.
  • 지대의 일부로 닭,계란,직물 등 현물을 바쳐야 한다.
  • 세금도 포함된다. 농지세,포도주세,방목세,산림세 등 토지세와 가축세,상속세,인두세,통행세,재판세, 수세,도로유지세 등 비토지세가 있지만 이 역시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 영주가 시설물은 독점적으로 소유했으므로, 교회,물레방아,양조장,빵가마,포도압착기 등을 이용하면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무상이고, 반대 급부가 없다. 농노의 생계는 오직 자신에게 딸린 조그만 밭에서 전부 해결해야 한다. 고전장원제를 기준으로 하면 농민 부담은 2/3에 달했다고 한다.

3. 쇠퇴

생산력 증대로 인한 무역과 상업의 발달,관료제 발달 등이 꼽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흑사병. 절대인구 자체가 감소하다보니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해서 상대적으로 농민들이 유리해졌다. 이에 따라 조건이 불만족스러우면 초기에는 상상도 못할 도주나 이주로 가버렸으며, 영주는 이게 싫으면 부역과 세금을 경감하는 등 유인책을 펼쳐야 했다. 물론 아니꼬운 높으신 분들은 노동자 조례[4], 노동자법 등의 법령으로 규제하려 시도했지만 대세는 막을수 없었다.

4. 재판(再版)농노제

그러나 동유럽은 서/남유럽과 달리 오히려 강화되었다.그 원인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수백년이 지나며 인구가 늘고 한계지(限界地)까지 모조리 경작한 서유럽과 달리, 아직 경작할 토지가 방대하였다.유럽지도를 펼치면 러시아쪽으로 땅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도시들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 귀족들은 도시들에 끊임없이 견제를 해서 발달을 방해했다. 한자동맹으로 대표되는 해안 도시들은 경쟁에서 패배하여 쇠퇴했다.
  • 인구과잉이 일어나지 않았다.
  • 전통적으로 동유럽은 타 유럽지역에 곡물수출을 해왔는데,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었으므로 곡물수요가 감소, 따라서 곡물가격이 하락하였다. 이는 고정된 지대를 받는 대지주인 귀족보다는 농노/농민에 더 타격이 크다.
  • 서유럽과 달리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이 강력해졌다.

이러다보니 극단적인 경우 러시아는 19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어 많은 채광 회사들이 우랄산맥에 생겨나자 땅이 아니라 기업이 농노를 소유하는 변질된 형태의 농노제도 발생했다.

5. 오해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농노제 역시 상당히 부정적인 시선만 받아왔던 제도이지만, 농노제는 중세 유럽의 농업기술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시스템임을 부정할 순 없다. 중앙집권과 행정이 몰락하여 한동안 분열과 전쟁이 지속되고 주교 등 종교집단에 상당수를 의존하는 시대상황상, 지배계급인 영주가 성을 쌓아 외침을 막고 생산력 유지를 위하여 농민을 땅에 붙잡아 두는 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루머인 '초야권'도 실제로는 '농노들은 결혼하려면 영주에게 결혼세를 내서 허락받고 해야 한다' 정도의 규칙이 부풀려진 헛소문이다.[5] 실제로 초야권 빌미로 신부들을 희롱하다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례가 유일한 초야권 기록이다.

거기다 대부분 매체들을 보면 영주가 농노들 수확물 전부를 징수하고 농노들은 풀만 먹다가 죽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영지민에 대한 착취가 심했던 일본도 일단 농민들은 살려만 둔다는 원칙으로 영지민이 살수있는 정도는 남겨두었다. 농노같은 영지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하면 농노는 이웃 영지나 다른 영지로 도망가거나 반란 등으로 반항하는 경우가 많았고 도적뿐만 아니라 이웃 영주들 침략도 대비해야하는 영주 입장에서도 지나친 수탈로 농노들이 몰락하는 것은 제살 깍아먹기라서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게 해야 했다.

6. 소작과의 차이점

소작과 흔히 헷갈리곤 한다. 하지만 소작은 땅을 빌리는 것이지, 지주의 소유물이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소작료를 너무 크게 요구하여 이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거나, 자진해서 노비가 되기도 했지만, 땅에 소속되는 순간부터 준노예상태가 되는 '농노제'와는 확실히 다르다. 자세한 것은 소작 문서 참고.

7. 영주의 권리와 책임 & 농노의 의무

  • 영주의 권리
    • 영주는 농노를 소유한다. 농노들은 영주의 소유물이다.
    • 영주의 땅에 속해있는 농노는 땅과 세트로 친다. 즉 영주가 토지를 팔거나, 빼앗기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면, 거기에 속해있던 농노들의 소유권까지 박탈당한다.
    • 영주는 농노들에게 부역을 부과할 수 있다. 상술했듯 부역은 온갖 잡무가 포함되어 있다.농/상업이 발달하면서 부역을 화폐 등으로 때우는 사례가 늘어나긴 했다.
    • 영주는 농노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영지 내는 일종의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으니 세금의 양,기간,수단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 영주의 책임
    농노제는 농노들을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농노들을 보호해야 하는 쌍방 계약제이다.
    • 영주는 정당한 이유[6]없이는 농노를 추방할 수 없으며 농노는 토지에 대한 점유권을 가진다.
    • 영주는 농노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당시 시대상 농노를 징집하는 대신, 대개 영주 휘하의 수비대가 전투를 담당한다. 만약 도적이나 외적으로 부터 영주가 농노를 보호해주지 않고 도망가면 영주는 자신의 영지와 농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자신의 근거지를 잃고 후에 나라에서 이 영지를 되찾아도 돌려 받기가 어렵고 되돌려 받아도 농노들 반발이 일어난다. 영주가 바뀌는 거야 농노들 입장에서야 지배자가 바뀌는 것지만 영주입장에서는 죽는 것보다 못한 것이라서 자신의 영지와 농노를 지키기 위해서 죽더라도 자신의 영지와 농노를 보호해야한다. [7]
    • 영주는 농노들의 분쟁을 조정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영주는 장원재판소를 통해 지역 내 사건을 관할하였다.
  • 농노의 의무
    • 농노들은 영주가 정하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세금을 얼마나,언제,어떻게 납부할지는 영주가 정한다.
    • 농노들은 영주를 위해 일,즉 부역을 수행해야 한다. 영주 직영지를 영주 및 가족들이 농사지을 수는 없으니 일방급부로 영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물론 일에따라 드는 비용은 모두 농노 자체부담이다.
    • 농노들은 영주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세 후기가 되면서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합법적으로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비합법적 수단은 대표적으로 도시로의 도주가 있다.
    • 농노들은 직업선택권이 없으며, 영주들이 지정한 직업을 수행해야 한다.[8] 이것이 훗날 서유럽 사람들의 성씨를 결정짓는 중요 요소가 된다.
    • 농노들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농노가 되며, 영주의 소유물이 된다.
  • 농노의 권리
    • 그딴 거 없다.[9] 사실 농노제는 일방적으로 영주층에 유리한 계약조건이다.

8. 농노와 노예의 차이점

농노는 예속된 처지지만, 노예들과는 비교되는 차이점도 있었다.
  • 농노는 결혼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다. 유럽에서 초야권이 있었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인신구속을 확인하는 세금 개념이었다.
  • 농노는 개인 주거지를 소유할 수 있다. 다만 주거지는 영주의 땅 내부로 제한한다.
  • 농노는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 영주는 농노만을 단독으로 매각할수 없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노예처럼 매각, 양도, 교환이 가능한 관행이 있었다.
  • 농노는 토지에서 나오는 작물을 소유할 수 있다.


[1] 에도시대 일본의 농민은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했고,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고구마와 감자를 많이 먹었다. 유럽의 농노와 매우 유사한 생활상이다.[2] 동유럽 지역의 경우 메밀은 과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메밀을 많이 심고, 밀은 영주에게 바칠 정도만 생산했다.[3] 그래서 "도시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자유를 느낀다"는 말이 있을 정도.[4] 흑사병이 한창 유행한 1349년 6월 제정된 영국 왕령.품삯과 노동조건을 흑사병 유행 이전으로 동결하려 하였다.[5] 예를 들면 "결혼세로 은화 10개를 내거나 첫날밤을 영주에게 바쳐야 한다." 같은 식이다. 마누라 뺏기기 싫으면 돈내라는 얘기인데, 누가 결혼세 아낀다고 첫날밤을 바칠까..[6] 물론 '정당한'은 엿장수..아니 영주 마음대로다.관습법이 그나마 있는 농노의 보호수단.[7] 전국시대 일본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것을 택한 이유도 자신들이 지키다가 죽으면 자신의 가문 소속원이 나중에 되찾아도 별문제가 안되지만 다이묘가 도망가면 말 그대로 근거지를 잃고 유랑하는 몸이된다. 이는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권력과 부를 제공하는 영지와 농노를 버리거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8] 대부분 부모직업을 세습하는 경우가 많고 직업 종류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대부분 농부 외엔 선택할 직업도 없었다. 드물게 특정 능력이 있어서 대장장이나 방앗간 등을 운영하는 운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농부로 나서는 경우가 대다수.[9] 굳이 있다면 영주 밑에 있으면서 안전을 보장받는 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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