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2:15:08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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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이 문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네로(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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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정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네 황제의 해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다섯 황제의 해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군인 황제 시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 ·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이밀리아누스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아우렐리아누스 타키투스 플로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동방
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우스 1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막센티우스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서방
동방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마그누스 막시무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통일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서방
동방
테오도시우스 왕조 호노리우스 콘스탄티우스 3세 발렌티니아누스 3세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르카디우스 테오도시우스 2세 마르키아누스
최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올리브리우스 글리케리우스 율리우스 네포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레오 왕조 레오 1세 레오 2세 제노 바실리스쿠스 2차 재위 제노
동방
레오 왕조 2차 재위 제노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누스 2세 티베리우스 2세 마우리키우스
- 포카스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라클리오스 공동 즉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라클로나스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노스 4세 유스티니아노스 2세
20년간의 혼란 레온티오스 티베리오스 3세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필리피코스 아나스타시오스 2세 테오도시오스 3세
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아르타바스도스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레온 4세 콘스탄티노스 6세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스타브라키오스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레온 5세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테오필로스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레온 6세 알렉산드로스 2세 콘스탄티노스 7세 로마노스 1세 로마노스 2세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로마노스 3세 미하일 4세 미하일 5세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콘스탄티노스 9세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미하일 7세 로마노스 4세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 알렉시오스 2세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3세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4세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요안니스 3세 테오도로스 2세 요안니스 4세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안드로니코스 2세 미하일 9세 안드로니코스 3세 요안니스 5세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마테오스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마누일 2세 요안니스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
제위 요구자(멸망 이후)
팔레올로고스 왕조 공동 즉위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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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1]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황제 즉위 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출생지 이탈리아 안티움 (現 안치오)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매장지 이탈리아 로마 도미티아 가 묘지
생몰 년도 서력기원 37년 12월 5일 ~ 68년 6월 9일
재위 기간 서기 54년 ~ 68년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본가2.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2.3. 즉위 초반과 친족 숙청2.4.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2.5. 로마 대화재2.6. 화폐개혁2.7. 몰락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세네카[2]를 중용해[3]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고 코르불로를 기용하여 파르티아 전선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즉위 초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여럿 죽이고 방탕한 생활로 인한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로마 제국의 여러 폭군에 비교하면 비교적 업적이 있음에도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를 평가하는 의견 중에서는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4] 몇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콤모두스, 포카스 등과 동일선상에 놓일 폭군은 아니더라도, 네로는 폭군이며 부적격자였다. 그가 저지른 실책은 칼리굴라보다 더 심각했으며 분명히 로마제국에 악영향을 끼쳐 그가 실각한 뒤, 내전에 접어들었다. 또 그 실책들은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들에 의해 정리된 건 사실이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네로는 본인이 한 일에 비해 후대에는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그가 만든 황금궁전 등은 분명히 네로의 실책이었고 코르불로 숙청 등의 연이은 행동은 군대의 신임까지 잃게 해 그를 몰락시켰다. 즉, 네로는 분명 폭군이자 암군이었으며, 여러모로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네로는 부모 모두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의 모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었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오며 그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또 그의 외삼촌은 칼리굴라이다. 따라서 네로의 외조부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이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낙점한 게르마니쿠스였고, 외조모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아그리피나였다. 부계로도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혈족인데,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셈이다. 어릴 때에는 영특하고 현명하였다고 한다.

네로의 본래 풀 네임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인데, 이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과 똑같고 가문 대대로 세습해온 이름 중 하나였다. 그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家)[5] 는 대대로 로마 집정관(consul)을 역임해 온 로마의 명문가이며, 네로의 조상 중에도 이름 있는 인물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네로의 고조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6], 그와 포르키아(Porcia)[7]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네로의 증조부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8]브루투스와 더불어 카이사르의 대표적인 적수(適手)였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안토니아의 아들이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기에, 대 안토니아의 누이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이종 사촌 동생[9]이 된다. 그런데 그나이우스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이므로 그나이우스는 그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오촌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부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뻘이 되지만, 모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손자뻘이 되는 것이다. (...) 또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중 한 명인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의 어머니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 레피다(Domitia Lepida the younger)이므로 네로와는 사촌 관계이다. 그만큼 로마 황실 구성원 간의 관계는 복잡하다.

네로의 증조부는 옥타비아누스의 최대 적수 안토니우스와 사돈 관계를 맺은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가차없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하였다는 이유로 인해 해군 제독으로서 악티움 해전 이전에 그가 세운 많은 공적과는 별개로, 그 인간성은 비루하게 여겨졌으며 그러한 인식은 그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 안토니아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던 네로의 조부 루키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이름난 전차기수였고,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게르마니아 전쟁에 참전해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눈 앞에 뒀던 장군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문의 이미지 때문인지, 실제인지 몰라도 지나친 폭력성과 비열함과 잔인함을 갖췄다고 비난받았고 평판이 좋지 않아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는 아버지 루키우스보다 평가가 더 안 좋았다. 네로의 친부는 권력과 황제 가문과의 가까운 혈연 관계만 믿고 막장 짓을 저질렀고,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비열하고 더럽기로 유명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모욕과 폭행은 예사였고 거액 사기 및 국고 횡령의 명수였으며 도박과 전차경주, 검투사 경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한 여자 관계가 매우 더러웠는데 그의 누이와 근친 혐의까지 받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 탓에 네로의 아버지는 결국 완전히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서 여러 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뒤 실제로 유죄판결을 받고 무려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을 내릴 당시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서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사형은 미뤄졌고, 갓 즉위한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때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을 사면해주면서 바로 석방됐다. 이후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석방된 지 얼마 안 있어 네로가 태어났는데, 네로의 아버지는 아들 네로가 2살도 채 되기도 전에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칼리굴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재산을 아들 네로 뿐 만 아니라 칼리굴라[10] 에게도 일부 넘긴다고 했었고 그것을 빌미로 칼리굴라는 그의 대부분의 재산을 가져가 버렸다. 죽음과 재산 기부, 당신의 선택은?! 그러나 칼리굴라가 가져갔던 재산은 네로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돌아왔다.

2.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네로가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해도, 네로는 어머니의 재혼 전까지 로마 사회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였고, 당시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메살리나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타니쿠스의 친모 메살리나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의 딸이었고, 네로에겐 고종사촌누나였다. 따라서 황실 정통성상 정상적으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네로의 사촌누나인 황후 메살리나가 간통을 넘어서 중혼까지 저지르고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가 전체를 먹칠한 뒤, 황제가 처벌을 미루던 중 황제의 해방노예 출신 측근 나르키수스에게 제거된 대형 스캔들이 터지면서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게 된다.

사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결혼은 아무리 근친혼이 성행하던 당시에도 무리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적됐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혈통적으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카와 삼촌의 결혼식은 법적으로는 성이 다른 결혼이어도 불가능하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뜻이 확고한데다 비텔리우스[11] 등 원로원 내 결혼 찬성파들의 지지로 통과됐다. 이렇게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면서 미성년이었던 네로도 어머니를 따라 황궁에서 살게 된다.

아그리피나는 황후가 된 이후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클라우디우스에게 영향력이 큰 측근들을 포섭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증조할머니 리비아가 과거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12]을 주도해 자신의 친아들 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의 공식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것처럼, 친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13]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는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와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음에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사위이자 의붓아들이며 조카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예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이름까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고 지어줬다. 아울러 아그리피나의 뜻에 따라 그녀의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임명시켜주고 네로의 교육은 박식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담당케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 양자 입적은 공식적으로 네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지은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양자 입적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양자로 삼은 네로를 여전히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14],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고작 5살에 불과한 친아들이 제왕교육을 시작할 10살이 될때까지 건재할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급사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그는 자신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가 너무 어려서 이 당시 친아들을 확정적으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공동 상속자로 지명했다.

네로의 양자 입적 후, 건강하던 클라우디우스는 54년 독살로 의심되는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아그리피나의 편이 된 황제의 측근들과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 등은 사실상 궁정쿠데타 형식으로 17세에 불과했던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에서 공동 후계자로 지명된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이 유언장을 무시했으며, 네로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을 방문했다. 이때 아그리피나, 부루스, 세네카 등은 네로를 앞세워 각 병사들에게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세네카가 신중히 작성한 원로원 선언서는 원로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2.3. 즉위 초반과 친족 숙청

오현제 중 지고의 황제로 불린 트라야누스의 평가로 와전됐다고 하더라도 네로의 첫 5년은 확실히 축제 분위기였고 실제로 네로의 8년은 성공적이었다. 원로원 앞에서 세네카가 만들어준 첫 연설문은 젊고 잘생긴 금발머리 소년 네로의 외모와 쾌활한 성격까지 결합돼 원로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설문에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따르고, 원로원의 특권들과 권한을 존중해주겠으며 본인은 오직 군 통수권만 갖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과거 칼리굴라의 첫 등장때처럼 네로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네로는 이런 환영속에서도 본인 스스로 원래 황제가 될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숙하지만 외모가 예쁘지 않은 옥타비아와의 결혼이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으로 명망이 높았고, 네로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터라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네로의 아내 박대가 스스로 정통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네로는 친구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옥타비아를 몰아내려고 했다.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황제 정통성이 되어주는 결혼을 스스로 깨려고 하는 네로의 행동에 아그리피나는 옥타비아 편을 들면서 아들과 대립했다. 이 때 네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고 했고, 아그리피나의 지나친 정치 개입으로 인해 친 아그리피나파 득세를 걱정한 세네카, 부루스 등이 아그리피나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친 아그리피나파 황실 관료들을 하나둘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클라우디우스 시대 이후에도 소 아그리피나를 도우던 칼리스투스는 실각, 나르키수스는 즉결 처형됐다. 네로와 세네카, 브루스의 행동은 당연히 모자 관계를 나빠질 대로 나빠지게 만들었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젊은 네로에게 예술과 음악, 시, 전차 경주에 대한 취미에 몰입하게끔 권장하면서, 모든 공식행사에서 네로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네로의 측근들은 젊고 미숙한 황제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행동할 것을 권장했다. 아울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에서 소 안토니아 생전부터 충성을 다하던 아그리피나의 오른팔 궁정대신 팔라스를 파면시키도록 했다. 따라서 아그리피나는 더이상 통제되지 않는 친아들 대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황제가 되어야 할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타이틀을 강조하면서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대 드루수스의 직계인 브리타니쿠스를 권좌에 앉히겠다고 협박했고, 아들 네로에게 배은망덕한 아들이라고 말하며 폐위까지 거론했다.

네로는 사실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당시 13살밖에 안 된 소년이었기에 이전까지는 그 아이를 질투했어도 견제하지 않았다.[15] 그러나 어머니의 분노와 협박이 단순한 폭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따라서 네로는 이때부터 위기감을 느꼈고, 어린 브리타니쿠스가 자신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선황제의 친아들이기에 일반 평민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 당장 어린 소년을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네로의 측근인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 역시 네로와 생각이 비슷했다. 친구였던 세네카와 부루스는 클라우디우스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를 키워 나가면서 아그리피나의 영향력을 꾸준히 악화시켜 모자 사이를 회복불능 상태로 만든 뒤 젊은 네로를 서서히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임을 내세우면서 근위대와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를 움직일 수 있는 아그리피나의 발언과 행동을 두 사람은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꼈다.

따라서 네로는 하수인을 시켜 독을 이용해 몇차례의 시도 끝에 식사 자리에서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한다.[16] 이때 네로는 능청스럽게 식사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독살을 의심하자 브리타니쿠스가 간질을 앓아서 급사한거라고 둘러댔으며, 일반 시민들도 독살을 의심하자 비가 억수로 쏟아붓던 날에 브리타니쿠스의 시신을 장례식도 치뤄주지 않고 서둘러 화장해 매장했다. 그리고 네로는 어머니를 호위하던 게르만 친위대를 경호인력에서 제외한 뒤 본국 출신 근위병들도 철수시켰다. 네로의 손에 브라티니쿠스가 독살된 지 몇 달 뒤, 자신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어머니 아그리피나마저 네로가 자객을 보내 살해한다. 이후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처형한다. 이런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이 때까지는 네로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네로는 자신의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직계들을 끝장내기 전부터 장인이자 양부, 외종조부인 클라우디우스를 능욕하고 있었다. 먼저 네로는 습관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희롱하거나 비하하는 농담을 즐겼다. 그는 세네카 등과 함께 늘 클라우디우스를 비꼬면서 “(클라우디우스가)세상에서 바보 노릇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말했다. 네로는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임자 이야기가 나오면 ‘계속 머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morari의 첫 음절을 일부러 길게 늘이면서 클라우디우스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으며, 양부를 “늙은 바보”, “멍청하고 잔인한 노인네”라고 불렀다. 또 그리스 속담을 인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가져온 버섯을 “신들의 음식”이라고 불렀다.

브리타니쿠스, 아그리피나, 옥타비아를 모조리 죽인 네로는 얼마남지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까지 여럿 살해했다. 그는 아그리피나 생전때 반란을 획책했다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인 아시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그 일가를 숙청했고, 친고모 도미티아 레피나 역시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고모 도미티아 레피나와 먼친척인 실라누스 일가가 무고죄로 고소됨을 알고 있음에도 이들에게 불리한 죄목을 덮어 씌우고 조작된 증거들을 이용해 이들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네로는 친족 살해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가 몰락할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2.4.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

다행히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라는 제어장치가 사라지자 네로는 조금씩 자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62년 보좌의 한 축이었던 부루스가 병에 걸려 죽자,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과 위협을 느낀 세네카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17] 이로써 네로는 아직 미숙한 상태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18]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19]"라는 장관직을 주고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으며[20], 부루스를 대신할 사람으로는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21]를 선택했다.

자신은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22]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장환상적이었다고 한다.[23]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명색이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고, 전차경기장이나 음악 경연장에서 워낙 모습을 자주 드러내다보니 실력 여하를 떠나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24] 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다만 네로 사후에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먹는 막장군주들이 속출한 덕분에 오히려 네로 치하를 그리워했다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25] 예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26]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통치는 그들보단 훨씬 잘했지만.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국방,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서방에서는 라인 방어선을 책임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와 브리타니아 전선의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국경지역을 보호하고 영토를 확장시켜줬다. 동방에서도 두 명의 장군들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바로 코르불로베스파시아누스였다. 특히 동방 정책을 담당한 두 장군 중 전임자로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는 훌륭했다. 따라서 로마는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냈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 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 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네로 황제가 국가반역죄다 어쩐다 한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은인이니까 계속 축제 열어도 괜찮겠음?" 하고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문제는 정작 네로 본인은 이걸로도 까였고 덕분에 한동안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이후 파르티아와 다시 전쟁을 하는것은 트라야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출정은 파르티아가 쳐들어와서 한 게 아니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의 정책을 파기하고 출정한 그냥 정복 전쟁[27]이다. 즉 협정을 깬 건 로마였다.

2.5. 로마 대화재

네로는 64년 자신의 연극 데뷔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부자와 상류층들에게 평가가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네로는 이 무렵부터 예전과 달리 몸이 점점 비대해져 갔는데 이때부터 자신을 내세우면서, 유흥과 사치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런 네로의 호화로운 생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네로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조직들을 이용해 로마 내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날조된 죄명을 덮어 씌워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어머니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방계 황족들까지 반역죄를 덮어 씌워 즉결 처형한 뒤 재산을 뺐았다. 여기에는 선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비롯해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이 네로에 의해 '인기가 많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포함돼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들의 자녀 및 손주들까지 네로의 명으로 살해당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칼리굴라의 반대파 숙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고, 로마의 여러 전통들을 황제 스스로 깨버린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류층에 해당된 일이었을 뿐, 아직까지는 하류층들의 네로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다. 우선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 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 중 4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에서도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고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일리아드, 오딧세이가 유명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 Nero Burning Rome 그 자리에 엉뚱한 걸 세우니까 이런 말을 들은 거다

하지만 이러한 루머와는 달리, 실제로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혼자 전차를 몰고 달려가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였다. 심지어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네로 방화 주범설'에 분노한 한 시민의 습격을 받았으나 의연하게 자신의 떳떳함을 밝혀 오해를 풀기도 하였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슬렀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한 데다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대화재를 네로가 직접 냈다면 네로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다. 네로는 그런 일로 정치적 생명을 말아먹을 멍청이는 아니다.[28]

그러나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가 화재와 무관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었고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이 계속해서 퍼졌다.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소문에 매우 질색하였으며 이를 일소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는 나라의 행사에 불참하고 군대에도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방화를 한 주범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기 시작한다.

단,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명) 원형 경기장이다. 아마도 이 설은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로마'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콜로세움을 떠올릴 만큼 콜로세움 자체가 유명하기 때문이고.

대신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도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했다고 한다.

이때 주범으로 몰려 죽은 사람 중 한명이 그 유명한 사도 파울로스(사도 바울)이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참수형으로 죽었다.

2.6. 화폐개혁

64년 발생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은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되었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29][30]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전의 대화재 사건 의혹이 가득찬 와중에 그 자리에다… 어? 혹시 자기 집 지으려고 우리집 다 태운뒤 연극하고 있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해도 별수없다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설상가상 네로의 사치는 여전히 심해 국고를 곧 바닥나게 만들었고, 화폐가치는 예전보다 급락했다.

따라서 네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골격을 유지한 새로운 통화 제도를 발표했다. 새로운 아우레우스(표준 금화)의 무게를 예전보다 10% 가량 줄이고, 데나리우스(표준 은화)의 은 함량 역시 비슷하게 줄여 네로의 새 통화 조치는 금화와 은화 간의 가치 차이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이때 동화를 새롭게 도입하고 예전보다 로마와 그리스 화폐 간의 균형화를 추진시켜 제국 내 통일 화폐 기준을 새로이 만들었다.

하지만 네로의 이 조치는 당장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물가가 10% 가량 오르게 만들어, 네로는 로마에 거주하던 하층민들에게 제공된 곡물 구호 정책을 해외의 모든 빈민과 로마 거주 서민들에게까지 확대 제공해야만 했다.

2.7. 몰락

대화재 이후 네로의 인기는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일 년만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의 암살 계획이 발각된다.[31] 이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지만, 세네카를 비롯해 시인 루카누스, 풍자작가 페트로니우스까지 포함된 사건이었다. 여기에 더해 가담자 중에는 원로원 지도급 의원들까지 연루돼 네로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세네카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모두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맥을 끊고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이때 확실히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스토아 철학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같이 억울하게 희생된 유명인사들도 있어서 네로의 행동은 로마 귀족들의 최고 덕목인 위엄(디그니타스)와 자유(리베르타스)까지 손상시켰다고 비난받았다.

대화재와 권좌 찬탈 음모 사건을 경험한 네로는 이런 상황에서 66년 가을 또 다시 말 많던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다. 네로는 첫 순회 공연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피 등을 여행하며 가수이자 배우이며 전차경기 기수[32]로 활동했다. 이때 네로는 1808개의 상과 우승 트로피를 독식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환영회와 호평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67년 그리스인들의 염원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부터의 그리스 해방 조치를 선물로 하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유대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환한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코르불로에게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할 것을 명령하였고 코르불로는 죽었다.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코르불로[33]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경악하고 분개하는 장병이 많았다.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군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코르불로를 의심해 자살하도록 한 네로는 그리스 바로 동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일대를 여행하고 이집트를 유람하기로 결정내렸다. 하지만 그의 여행 계획은 즉각 취소되었다. 코르불로 사후 일 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네로에 대한 불만은 과거 그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혼낼때 항상 하던 말인 “로마인답지 않은 행동과 태도”에 대한 로마 상류층과 군인들의 불만, 그동안 전임자를 비방하고 친족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한 부도덕함, 사치를 위해 이탈리아 내 사유지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대규모 농장들을 탈취, 몰수한 조치, 군단병들의 급여 체불, 속주세 인상 등이 복합적으로 터져서 발생한 반란이었다.

네로에게 반기를 든 빈덱스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총독 갈바와 루시타니아(오늘날 포르투갈)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친구인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푸스는 빈덱스와 결전을 벌여 반란군을 격파했다. 루푸스에게 패배한 빈덱스는 패전 후 자결했다, 하지만 빈덱스 자살 후에도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사실상 네로에게 불신임권을 행사하면서 그동안 라인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루푸스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루푸스는 이를 거절했다. 이렇듯 서방 속주 군단병들과 루푸스의 게르마니아 전선 일대의 진압군마저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자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을 압박했다. 이때 갈바는 자신의 대리인들을 로마 근위대 병영으로 보내 자신을 지지하면 병사 1인당 8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울게 됐다. 이를 본 원로원 역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공적으로 만든 뒤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 때 네로의 근위대장까지 공적이 된 네로를 버리고 갈바 쪽으로 붙게 된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배를 타고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으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민중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34]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
Qualis Artifex Pereo(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

그래도 네로가 종종 시혜자이자 즐거움을 주는 황제로 기억되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시민들과 하층민들의 원한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죽은 뒤 그 시체를 테베레강으로 던져라 등의 별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 밝혀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3. 평가

네로는 오늘날까지 희대의 폭군으로 까이고 있지만, 폭군이자 암군임은 사실이어도 후대에 등장하는 콤모두스, 포카스와 같은 폭군과 동급으로 묶일 황제는 아니다고 평가받고 있다. 네로는 성격 자체도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었고, 제대로 된 제왕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으며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또한 주변에서 그를 제대로 통제해줄 측근들도 부족했다. 수도 로마의 관리에도 재능이 없었기에 제국의 통치자로서는 분명 부적격한 사람이었다.[35] 오히려 그는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이나 기업 경영인보다는 연예인이나 아이돌에 더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와 많이 동급으로 취급받는 콤모두스와 달리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개인으로서는 호감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그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데다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다고. 대부분은 네로의 유모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의외로 일반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머니 아그리피나, 처남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36] 포파이아와 혼인하기 위해 원래 부인이었던 옥타비아마저 간통죄로 몰아서 추방시키고 살해한 부분과 포파이아와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포파이아를 발로 차서 죽여버리는 등 이후에도 이해하지 못할 근친살해 행각을 이어나간 부분은 그가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울러 당시 얼마 남지 않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까운 친인척들과 코르불로에게 억울하게 유죄를 뒤집어 씌운 뒤 그 일가를 살해한 부분도 그렇다.

네로가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러 대화재를 초래하고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면서 리라를 켜고 시를 읊었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루머일 뿐이고 네로 본인은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 눈물나게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화재 직후 황금저택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패착이었고[37] 여기에 더해 후대의 간토대지진 때처럼 애꿎은 크리스천들에게 무고한 누명을 씌워서 학살한 바람에 전 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난 뒤에는 아예 죽일놈으로 평판이 더욱 나빠진다. 오늘날까지도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로마 역사상 크리스트교를 크게 박해한 황제'로서 완전히 인식이 박혀 있다.

굳이 크리스트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수에토니우스[38]디오 카시우스[39]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먼저 그는 여러모로 ‘당대 로마인’답지 않았다. 네로는 제국의 황제임에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40] 구레나룻부터 턱수염을 길게 길렀고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다 이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소문’이 실제한 악행으로 왜곡되어 비난받는게 아니라 실제 행동이 문제였다. 바로 당대 로마에서 그리 좋은 취향이 아니었던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문란"했고, 사치 역시 심각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

정치 스타일도 점차 변해서, 처음에는 나름 신중했던 성격이 가면 갈수록 광포해졌으며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무절제한 사치 행각이 날로 극심해졌다. 이러한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서 네로는 로마의 다른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네로의 선물비용은 20억 세스테르티우스로 로마의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당시 로마에는 소득세가 없어[41] 고스란히 속주세로 메워야 했고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으며, 심지어 부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재산을 갈취하거나 속주 왕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속주와 원로원, 상류층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속주 브리타니아에서의 켈트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속주 유다이아(유대)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네로 사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를 잉태하여 로마 제국을 한동안 내전에 시달리도록 하였다.

네로가 탄압하고 숙청한 것은 주로 귀족과 상류층과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42] 의외로 그의 수탈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로마 민중들의 네로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노예가 법정에서 주인에게 항의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면 속주와 원로원의 반역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겠지만, 네로는 이를 살릴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 그만한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리도 만무했겠지만. 후대에는 네로에 대한 평가가 더욱 나빠졌는데, 예컨데 콜로세움[43] 터에 있던 네로 황제의 청동상과 인공호수를 로마인들이 없애버린 것이 그 예이다. 굳이 지반이 불안정한 호수를 매꿔가면서까지 네로 황제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것을 보면 굉장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

4. 기타

  •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네로가 어린시절 암살 시도가 있었었는데 이때 암살자들이 뱀허물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이 뱀 허물을 황금 팔찌로 만들어 네로가 착용하고 다니도록 시켰는데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팔찌를 버렸으며 얼마 뒤에 그가 몰락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출처:수에토니우스, 12명의 카이사르, 네로 편 6장)
  • 네로의 아내인 포파이아 사비나는 목욕을 위해 당나귀를 500마리나 길렀으며 본인의 피부 관리를 위해서 아침과 저녁에 당나귀 젖으로 목욕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500명의 노예를 두었고 여행을 떠날 때도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 향수, 향신료, 장미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네로는 유명한 향수마니아였고,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와 인기를 끌던 장미에 대해서도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장미로 만든 향수로 분수를 만들어 배치했으며, 향수 바른 새를 집안에 날아다니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개최한 연회에서도 사람이 장미에 깔려 질식사할 정도로 장미와 향수를 사랑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함께 사용하는 방에 장미 꽃잎을 가득 채워 지냈고, 늘 장미 꽃잎을 채운 욕조에서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아울러 네로는 값비싸기로 유명한 향수와 향신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했다고 하는데, 아라비아에서 생산되는 향수 10년치를 아내 포파이아 장례식에서 한번에 사용했고 시나몬을 한 도시에서 1년 소비할 양만큼 하루에 태웠다.
  • 네로는 암살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계속 독약을 마시며 내성을 길렀다고 한다. 네로는 채찍형으로 죽을 거라는 말을 들은 이후,[45]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위해 자살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택한방법이 독물자살(...). 독내성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번의 시도후 원하던 대로의 죽음을 맞게된다.
  • 공교롭게도 칼리굴라와 같은 안티움 (이탈리아어로 안치오) 태생이다. 안치오는 폭군들만 나온 땅이라 네로 사후엔 잊혀졌다가 1944년에 와서야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다시 역사에 나타나는데, 이 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리얼 흉지

* 최근 네로 황제의 지하 궁궐이 발굴되었다.

5. 대중매체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콤모두스'와 '바실리우스'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고,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실리우스[46]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1] 양자 입적 후[2] 세네카가 유능한 사람인건 사실이지만 네로의 스승인 그 역시 책임이 없진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파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10대 사춘기였던 네로에게 프린켑스로서 네로가 돋보여야 된다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취미활동인 전차 경기 몰두와 음악 활동을 장려하고 헬레니즘 군주와 같은 행동도 하도록 조언해 결과적으로 네로를 통제하기 힘든 황제로 만들고 말았다.[3] 네로와 달리 이전 황제들인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여겨 그를 견제했고, 죽이거나 완전히 추방시킬 생각도 했다. 실제로 세네카는 로마로 복귀한 이후, 신임 근위대장이 된 브루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친구가 되었고, 서서히 힘을 키워나가면서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다.[4] 어디까지나 '기질'이 강했을 뿐, '재능'은 별로 없었다.[5] 여담으로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인물들에 대해 당시 로마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평가가 하나같이 좋지 못하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 등은 아헤노바르부스 가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이 후술할 네로의 증조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그나이우스라고 기록했다. 네로의 조부 그나이우스와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만 해도 뇌물을 굉장히 밝혔으며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여 푹 빠져 재산을 낭비했다고 한다. 성격은 더 심하여 탐욕적이고 상스러웠다고 여러 역사가들이 전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는 게, 당시 역사가들 중에 네로를 좋게 본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대 조상들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6] 네로와 동명이인이다. 서양에서는 꽤나 흔한 일.[7] 로마의 유명한 학자 대 카토(Cato the elder)의 증손녀이자 소 카토(Cato the younger)의 누이이다.[8] 해군 제독이었으며, 악티움 해전 당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는데, 연이은 패전과 전쟁은 뒷전이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그를 배신하여 진영을 이탈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향했으나 곧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9]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 생,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생,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년 생이다.[10] 사실 안토니우스의 두 딸을 통해서 네로와 칼리굴라는 6촌 형제가 된다. 왜냐하면 칼리굴라의 할머니가 소 안토니아이고, 네로의 할머니는 대 안토니아이기 때문.[11] 네로 사후 갈바,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제위를 놓고 다툰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이다.[12]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를 낳았고, 소 아그리피나는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낳은 3남 3녀 중 넷째이자 장녀이다.[13] 브리타니쿠스의 동복 누이로 엄밀히 말하면 친어머니를 기준으로 네로와는 5촌사이이다.[14] 네로는 이에 불만을 품고 클라우디우스 면전에서 “브리타니쿠스는 뒤바뀐 아들이잖아요”라고 대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5] 브리타니쿠스는 어렸지만 목소리가 좋고 호감가는 소년이어서 일반 평민들에게 황제의 양아들인 네로보다도 호감을 얻고 있었다.[16] 네로는 독약 전문가인 로쿠스타라는 여인을 고용해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 이때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한번에 죽이고 싶어 했는데, 로쿠스타는 독약을 먹였다는 의심을 줄이기 위해 양을 조절해 브리타니쿠스가 배탈에 시달리며 설사하는 것에 그쳤다. 따라서 네로는 “너는 내가 율리우스법 따위를 두려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호통치면서 그녀를 심문하고 매질한 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독약을 제조케했다. 네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돼지에게 독을 직접 실험케해 돼지가 즉사하자 그 약을 가지고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17] 세네카가 스스로 물러난 이유 중 하나는 부루스 후임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가 그를 뒷조사한 까닭이 컸다.[18]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나온다. 서양사에서는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 판본에 따라서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간단하게 페트로니우스라고 잘 알려있다.[19] 우아함을 관장하는 장관 혹은 우아함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진다.[20] 즉 취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페트로니우스의 결정이 바로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다.[21] 생선 도매상과 말 사육사로 일했던 사람으로 부루스 생전부터 네로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부루스 사후 근위대장, 소방대장, 경찰대장에 임명돼 네로 재위 후반기동안 밀고, 고발과 무고, 납치와 고문 등을 통해 세야누스 못지 않은 공포정치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티겔리누스는 세야누스와 달리 제위를 노리지 않고, 말 그대로 네로의 통제 속에서 권력 찬탈 음모를 발본색원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22]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23] 시민들은 매우 끔찍한 시를 들으면서 강제로 환호와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싫은 티라도 냈다간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다만 어느 재치 있는 시민 3명은 훌륭하게 시 낭송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 명이 갑작스레 쓰러진 척을 하자 다른 두명은 쓰러진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잡고 들어올려 시 낭송회를 빠져 나갔다.[24] 콤모두스의 경우 네로와 달리 진짜 검투사로서 실력이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는데 뛰어난 쇼를 많이 보여줬는데도 놀고만 있다고 욕을 먹었다. (물론 콤모두스는 네로보다 더한 막장 군주다) 애초에 이들은 검투사나 예술가가 아닌 황제다. 아무리 예술이니 스포츠니 신경 써도 정치를 못하면 군주로서 실격이다.[25] 5현제라고 칭해지고 동시대의 사람들도 황금시대 라고 말하던 트라야누스도 미소년 동성애에 대한 스캔들 논란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무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대놓고 안티노우스를 사랑하기도 했다.[26]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27] 이사람은 네로의 정책뿐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협정도 깨버리고 다키아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이다.[28] 이때의 화재진압과 시민들을 위한 여러 대처는 네로에 대해 혹평을 했던 동시대의 최고의 역사가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29]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0] 실제로는 이름만 이렇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될 수 있는 공원과 같은 구조로 지으려 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대체 왜 도무스 라는 이름을 썼냐는 비난을 한다. 도무스가 사저를 뜻하는 단어였다고 한다.[31]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 시도 계획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32] 검투사 못지 않게 고대 로마 시대에 전차 기수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고, 네로의 할아버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처럼 명문귀족임에도 유명 전차기수로 활약했던 상류층들도 꽤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검투사들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권투선수, 격투기선수나 보디빌더 이미지에 가까운 운동선수였다면, 전차기수는 오늘날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같은 인기 스포츠 선수와 이미지가 더 비슷했고 이들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33]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34] 당시 로마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기분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으며,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이를 맞게 된다면 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런 채찍질은 단순히 몇 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하게,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이렇게 얻어 맞으면 사형수는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뼈,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35] 네로 사후에 난립하게 된 네 명의 황제(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 모두 스스로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를 이어받겠다"고는 했어도 네로나 칼리굴라를 언급하지는 않았다.[36]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자신의 아내 파우스타와 장남 크리스푸스를 살해한 혐의가 있다.[37] 로마 대화재 당시에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눔에 있으면서도 로마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에 곧장 로마로 돌아올 생각을 한 것도 그렇고,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신 소유의 정원을 개방해 캠프를 짓게 하고 모든 속주에 명령해 구호 물자를 로마로 보내게 하고, 가연성 소재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법령까지 짓은 것은 좋았는데, 하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황금 저택을 짓겠다고 하면 가뜩이나 민감해져 있는 감정에 "저 자식 일부러 불 지른 거 아냐?"라는 가짜 뉴스가 나돌 수밖에 없다. 여기에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이전의 발언들까지 들춰지면서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크게 이미지를 깎아먹었다.[38] 다만 이 사람은 원래 네로뿐 아니라 다른 황제에 대해서도 평가가 박하고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어떤 때는 아예 있지도 않은 루머까지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저서에 수록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39] 이 사람은 네로가 죽고 백년 쯤 뒤에 태어났다.[40] 로마 황제들이 본격적으로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부터였다.[41]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소득세 개념 의 세금이 존재 하기는 했으나 그리 큰 액수도 아니었고(세율 1%) 군 장병들의 급여용으로 책정된 목적세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42] 참고로 네로 당시의 기독교는 주로 상류층이 믿는 종교였다.[43]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도 불리며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곳에서 약탈해온 보물들로 지었다고 한다.[44] 한달에 한 번은 반드시 부추와 올리브 오일을 먹거나 공연 날짜가 잡히면 빵같이 목에 안좋다고 여기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고 부추만 입에 달고 사는 등으로. 당시엔 부추가 목에 좋다고 여겨졌다.[45] 이 때 쓰는 채찍이 날카로운 납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린 것으로 살점을 거의 파내다시피 뜯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다.[46]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