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6:09:34

남성혐오 불성립론/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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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혐오의 개념이 약자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입장2. 제한적으로 남성혐오가 가능하다는 입장3. 남성혐오는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입장4. 현대 페미니즘 시초의 남성 혐오 비판5.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정량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려움6. 관련 문서

1. 혐오의 개념이 약자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입장

많은 국내의 학자들은 혐오는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강자에 대한 혐오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서울대 이준효 박사는 혐오의 좁은 정의를 받아들일 근거가 없다며 반론하였으며,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일반적으로 강자인 미국인들에게 자행하는 테러리즘 또한 정당화할 수 있다며 반론하였다.[1] 그러면서 혐오표현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는 무고한 사람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논증하였다.

이런 사례처럼 혐오의 개념은 학자들마다 다르며, 약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정의를 모든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2. 제한적으로 남성혐오가 가능하다는 입장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는 혐오가 권력이 있는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이 논리를 토대로 젠더 권력의 비대칭 속에서 여성혐오가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우에노가 여성 역시 위와 같은 논리를 따라 특수한 상황에서 남성을 혐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사실은 매우 덜 알려져 있다.

여기서의 "특수한 상황" 이란 바로 성매매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내들이 남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언제 어느 때라도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흔히 받아들여지는 반면, 성매매 여성들은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금액을 남성이 자기 전상에 바칠 때까지는(...) 섹스 요구에 "No" 라고 거부할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수 남성들이 이때 상대방 여성의 가치를 질이라는 성욕충족 도구로 환원하는 여성혐오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성매수 남성의 가치를 욕망이 그득 담긴 채 발기된 페니스로 환원하는 남성혐오를 한다고 한다. 우에노는 이때 여성이 남성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화대를 낮게 부르는 전략[2]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을 대상으로 분석해 보인 바 있다.

종합적으로 우에노 역시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면 남성혐오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며 권력의 여부에 따라 그 심각성의 경중을 달리하기는 하나, 때로 여성 측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여성도 남성을 혐오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물론 바로 위에 소개된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강성 운동가들은 "어차피 그래봐야 성매매 산업 자체가 여성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것이므로 결국에는 그것도 남성혐오가 될 수 없다" 고 반발하는 등, 여전히 논쟁은 가시지 않고 있다.

한편 이화여대 철학과 김선희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혐오 미러링》 에서 남성혐오가 가능하기는 하되, 젠더 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의 혐오 정동 이상으로는 나아가기 어렵다고 언급하였다. 위의 윤김지영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이 도서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무작정 "약자니까 이건 혐오가 아니고 분노" 라고 언급할 것이 아니라, 설령 분노의 정동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혐오의 정동도, 다른 제3의 정동도 함께 섞여있을 수 있다고 반론했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서 워마드미러링을 들었다. 즉 미러링 그 자체를 남성혐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남성혐오는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입장

반남성적(anti-male) 메시지가 실제로 존재하며 여기에 페미니즘이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 역시 존재한다.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철학여성학을 가르치는 페미니스트이자 남성성 및 페미니즘 대중화를 연구하는 해리 브로드(H.Brod)는 자신의 저술에서[3] 반남성적인 메시지는 페미니즘으로부터가 아니라 (원서의 표현을 바로 빌리자면) "반여성주의 우익 이데올로기" 에서 나온 것이고, 더 이상 사회진보적 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페미니즘은 남성의 본성을 불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들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반남성적 정서를 가지기에 충분한 경험, 아니 그 이상의 경험을 겪었음에도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해 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어떤 진보 조직이나 운동도 남성을 타고난 강간범이나 폭력범으로 그리면서 남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급진적인 주장으로 포장되어 나타나거나 생물학적 결정론이 사회 결정론으로 포장된다 해도,[4] 그런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들은 남성을 변화를 요구할 수 있으며 또한 변화를 격려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은 변화할 능력이 없는 존재, 단순히 반대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존재로 냉혹하게 묘사된다. 반남성 이미지는 정확히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반대되어야 한다. 그런 이미지는 그것을 제시한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결국 그들을 보수적인 위치에 놓이게 한다. 나는 그런 위치에서는 어떤 진보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해리 브로드(H.Brod), pp.275-276 (김고연주, 이장원 공역)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인 벨 훅스(B.Hooks) 역시 반남성적이고 분리주의적인 래디컬 페미니즘에 비판적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인종차별 운동 역시 결과적으로는 압제자 위치에 있던 백인들의 이해와 협력을 통해서 진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페미니즘 역시 반남성적인 남성관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특히 하위 계층으로서 여성들은 상위 계층의 다른 여성들보다는 하위 계층의 남성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반남성적 메시지를 설파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관점에서는 그저 "부르주아 특권층 백인 여성들이 다른 특권층 백인 남성들의 혜택을 빼앗아 오려는", 어찌보면 밥그릇 싸움(...)과도 같은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여성학자이자 모성신화(myth of motherhood)에 대한 비판으로 페미니즘 철학에 기여한 바 있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Badinter)는 자신의 저서 《잘못된 길》(Fasse Route)에서, 1990년대 무렵에 프랑스에서 발흥하던 문화적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 및 성부정론 페미니즘(sex negative feminism)이 페미니즘의 본래 철학적 인식론을 저버리고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강간범이고 성범죄자이며 가해자이다" 의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를 철저히 따르는 페미니스트로서, 바댕테르는 사회적 합의로서의 젠더,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의 대명제에 위배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따른 결과 이들 페미니즘이 오히려 퇴보를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들이 남성의 생득적인 본질에 호소하는 이상, 남성은 물리쳐야 할 적으로 상정되며, 이는 남성 전반에 대한 비난만을 초래할 뿐 여성들의 현실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 성에 대한 집단적 비난은 성차별주의적이며 정의롭지 못하다. 폭력 자체를 남성들의 슬픈 특권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을 혼동하면서, 우리는 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진으로는 올바른 처방을 내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오로지 남자들과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평등을 이루어 나가는 것만이 여성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으로부터 특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저항을 하고 으르렁거려야만 한다는 걸 대부분의 여성이 알고는 있지만, '한 성이 고통스러워할 때에는 다른 성도 역시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는 마거릿 미드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성운동에 의한 변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고,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남자들과 함께 더욱더 잘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Badinter), pp. 81; 180 (나애리, 조성애 공역)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4. 현대 페미니즘 시초의 남성 혐오 비판

현대 페미니즘을 시작한 대표적 리더 베티 프리단은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남성혐오 성향을 명백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유아인 사이버 불링 사건 때 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folding 주장 [접기 • 펼치기]

프리단은 만일 1960년대의 여성들이 '여성적' 신비의 희생자라면, 1980년대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적' 신비의 희생자였다고 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성들을 그들의 꿈에서 이탈시킨 것은 프리단에 의하면 "성희 정치학"[5] 이었다. 프리단은 모든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는 포르노 작가이고, 매춘 중개인이고, 성추행자이고, 강간범이고, 여성학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생산적이라고 천명했다. 그러한 "남성 혐오증"은 부당하다. 그녀의 판단으로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좋아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남성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페미니즘은 그 어느 것이라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로즈마리 통 지음; 이소영 옮김 ,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서울: 한신문화사, 1995, 36쪽유아인 갤러리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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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프리단은 현대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고 미국 페미니즘의 초석이 되는 책을 저술했다. 행동주의적 저작과 그녀의 책 《여성의 신비》은 여성 운동가에 참여하는 작가, 교육자, 작가, 인류학자, 기자, 활동가, 조직, 노동 조합 및 일상 여성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6] 이 책은 또한 상단의 한국 논자들이 취하는 입장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권위 있는 서적이다.

5.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정량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려움

윤김지영 교수를 위시하여 많은 여성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은,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므로 여성에 대한 멸시가 여성혐오라고 보는 것은 온당하나, 남성은 사회적 강자이므로 남성에 대한 멸시는 혐오라고 볼 수 없으며,[7]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남성에 대한 저항이 된다" 는 것이다. (이 주장을 편의상 '남성혐오 불성립론' 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논리를 살펴보면, 만일 우리 사회가 남성이 사회적 강자라는 점을 납득할 수만 있다면, 남성혐오로 알려진 여러 사건들 역시도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혐오 불성립론이 대중적 상식의 차원으로 확산됐다는 징후는 없다. 박가분리얼뉴스 기고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 남성혐오 불성립론은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의 영역에서만 그쳤을 뿐, 현실규범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워마드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도촬 사건에 관련하여, 그는 여성인 판사가 참여한 재판부조차도 워마드를 '남성혐오 사이트' 로 명시했음을 지적했다. 페미니즘 비판자 중 하나인 이선옥 역시 자신의 웹 사이트에서 "보통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으로 대중을 윽박" 질러 왔다고 말했으며, # 경향신문 기고에서도 "이념의 장에서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규범의 장에서 여혐과 남혐은 모두 모욕과 명예훼손으로 처벌" 될 뿐이라고 단언했다. # 요컨대, 남성혐오 불성립론은 사법부를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론이 항상 대중적 상식과 일치할 의무는 없다. 때로는 반직관적(counter-intuitive)인 이론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남성혐오 불성립론은 어째서 대중의 인식을 바꾸지 못한 채 그들만의 고담준설로 남게 되었냐는 것. 페미니즘이 "남성은 사회적 강자이므로 남성혐오는 없다" 고 외친다는 것을 대중들도 이제 잘 알지만, 한편으로 대중들은 "여혐이 나쁜 것처럼 남혐도 해서는 안 되는 것" 이라고 여전히 인식한다. 남성혐오 불성립론이 대한민국 사회를 설득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하나는 현실인식을 달리하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는 데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통계량과 같은 객관적 수단으로 정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여타 이론들이 외적 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통계적 분석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동안, 남성혐오 불성립론은 정동(affekt)에 대한 철학적, 관념적, 비평적 논설에 집중했을 뿐, 남성들이 사회적 강자라는 핵심 전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실태조사 결과조차 내놓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안티/포스트페미니스트들에게 "남성이 사회적 강자라는 근거가 어디 있냐" 는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 이들이 정량적인 입증을 시도했다 하더라도 이 전제는 수치상으로 보여주기가 매우 까다로운 종류에 해당한다. 남성들이 사회적 강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떤 사회적 지표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사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며, 인류학적 부족사회처럼 귀인들이 시인성 높은 장식이나 문신을 하는 사회도 아니고, 대한민국 헌법을 통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전 국민이 평등하게 행복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자신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 속 어딘가에 강자들이 숨어있다고 할 때, 그들의 권력을 명확한 수치 몇 가지로 보여주는 건 매우 어렵다. 여성학이 양적 접근보다는 질적 접근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남성혐오 불성립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 즉 '남성은 사회적 강자' 라는 진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져 온 지표들로는 대개 다음의 것들이 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명쾌하게 입증하지 못한 상태이다.
  • 남성에 비해 여성이 갖는 사회적 가치의 비교?
    리버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전체에서 숫자에 가장 친화적인 분야다. 국회의원 여성 비율이 몇 %, 이공계 여성 교수 임용률이 몇 %, 임금격차가 월별 몇 만원, 대한민국의 성격차지수 세계 몇 위 등, 이런 통계들은 실제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할당제 등의 정책들을 내세우기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 여성가족부 역시 업무성과를 평가할 때 이런 지표들을 주로 활용하며, 실제로 이런 숫자들이 '우려할 만한' 수준일 때에는 페미니즘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이런 지표들이 갖는 문제는, 결국 대안적 설명을 너무 많이 열어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열한 통계들 중에 구구한 반론이 없었던 지표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성격차지수의 경우 남성의 사회적 우위를 입증하는 데 직접 활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한계점들이 발견되었다. 임금격차의 경우 수많은 원인들이 임금수준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다 뜯어봐야 한다. 차이가 존재한다 해도, 그 차이는 차별로 인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숫자들은 왜곡과 오염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남성이 사회적 강자인 것처럼 '착각'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안티/포스트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며, 이 수치들만 가지고는 이런 반론을 물리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저런 류의 논리를 차용하자면, 동일 논리로 산재사망자의 대부분이 남자인 것을 두고 남자가 오히려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고 위험한 업무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 성 관련 이슈에 대한 인식조사?
    KOSIS에서 양성평등 실태조사 등을 검색해 보면 거의 대다수가 '~에 대한 견해', '~에 대한 인식' 과 같은 인식조사로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실태조사가 객관적이고 제도적인 상황을 살핀다면, 인식조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살핀다. 인식조사를 통해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결국 "귀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성취보다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식의 질문지법을 활용하게 된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암묵적 연합 검사(IAT; implicit association test)라 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에 대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호오의 태도를 컴퓨터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되어 있다. 페미니즘에서도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라 하여,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대중이 경각심을 갖게 하는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

    인식조사를 지표로 활용할 경우 갖는 문제는, 직접적으로 설득하기에는 지나치게 간접적인 지표라는 데 있다. 성차별이 엄존하는 실태를 파악하고 싶은데, 내세우는 자료라고는 사람들의 주관적 인식일 뿐인 것이다. 결국 그 해석도 "우리 사회가 객관적으로 남성 우위라더라" 가 아니라 "사람들이 대개 남성 우위로 느낀다더라" 로 바뀌고, 설득의 힘도 많이 빠지게 된다. 여성가족부 역시 많은 예산을 섣불리 굴리지 못하고, 그저 '공무원 양성평등 특강', '인식 개선 사업', '성교육 의무 이수' 같은 부스러기 사업들만 가능할 뿐이다.[8] 인식조사 결과 "사람들은 정말로 남성을 강자로 인식한다더라" 해석이 나와도, 이런 식으로는 어차피 여성을 직접 대등한 강자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주관적 인식은 조금씩 다 다르기 때문이다.[9]
  • 성범죄 관련 통계?
    법무부경찰청에서 발행하는 백서나 각종 통계자료들은 페미니즘 진영에서 여성안전 이슈를 부각시키기 위해 즐겨 활용된다. 특정 성범죄가 발생하는 연간 추이, 특정 성범죄의 가해자 성비, 특정 성범죄의 피해자 성비 등을 통해서 남성이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성범죄 가해자가 주로 남성이고, 피해자가 주로 여성이라면, 이는 남성이 육체적 완력을 바탕으로 여성의 신체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라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 분야에서도 《페미사이드》 를 비롯하여 여성 대상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근거를 제시하려는 흐름이 존재해 왔다.

    이 경우의 문제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성범죄 이슈 자체가 페미니즘 담론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적 강자 여부를 가리는 데 특정 범죄만을 놓고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범죄 분야에서 여성이 명백히 피해자로 나타나는 경향이 관찰된다 해도, 남성들의 피해 비율이 여성들보다 더 높은 범죄 유형들도 분명 존재한다. 상해와 폭력만 해도 남성이 여성보다 피해자가 많으며, 전체 범죄 유형으로 확대했을 때 피해자 역시 남성이 더 많다. 세상에 범죄는 성범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범죄 피해들에서 남성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 들어온다면 이에 대해서는 남성이 강자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성범죄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하자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러니까 남성이 사회적 강자가 된다' 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할 수 있다. 애시당초부터 범죄를 저지르는게 '사회적 강자'라는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10] 미국에서 흑인의 범죄율이 타 인종보다 높게 나온다고 해서, 흑인을 '인종적 강자'나 '사회적 강자'로 취급하지는 않는다.[11]
  • 정상성과 문화 규범에 대한 분석?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을 정상성(normativity)으로 분류하는 규범이 사회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여기서 규범은 제도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회화의 압력이며, 이로부터 암묵적인 불이익의 형태로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규범을 누가 만들고 어떻게 주입하느냐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며,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이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문화비평 분야에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화 콘텐츠 속에서 남성성의 정상화 및 여성의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발견된다면, 이는 남성이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관점이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의 문제는 양적인 객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화, 암묵적인 규범적 압력, 미디어의 시각적 도상들을 어떻게 손에 잡히는 숫자의 형태로 바꾸어 보여줄 것인가? 문화비평 분야에서 롤랑 바르트 같은 철학적 사변들과 현학적인 이론화가 흔한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숫자 없이는 제도권을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 숫자가 없으면 사회를 바꾸고 싶어도 '언제까지, 어디까지' 바꿀지에 대한 정책적 기준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상기한 인식조사의 형태로 남성우위적 규범의 존재여부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 뭇 여성들의 삶의 경험에 의거한 호소?
    82년생 김지영〉 에서도 그렇지만, 사실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줄곧 '여성이기에,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역경의 경험' 을 중심으로 성차별의 존재를 실감해 왔다. 상담심리학계의 미세공격성 이론에서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요컨대 어떤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는다면, 그 집단이 주장하는 사회적 대립구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피해망상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또 다른 가해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학계에서 통계에 대해 시큰둥한 이유 역시, 숫자로는 여성들의 미묘한 삶의 어려움이 잘 안 잡히기 때문이다.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여성억압에 대한 간접경험을 갖고 있는 남성들까지도 통계 따위 없이도 경험의 공유를 통해 곧바로 설득이 가능하다는 관점이다.[12]

    더 말할 것도 없이, 이는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심전심은 될 수 있어도 경험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설득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비단 남성들뿐만 아니라 억압의 경험이 많지 않거나 혹은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 온 여성들 역시, 남성이 강자인 사회라는 대전제에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고 실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간접경험을 쌓기도 어렵거니와 그나마 억압을 목격한다 해도 당사자의 부족한 능력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숫자가 없음으로 인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한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동일한 경험을 지닌 수많은 여성들을 결집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끝내 설득되지 못한 채 진짜로 저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한다. 양쪽이 살아가는 세계가 같음을 객관적 숫자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적절한 숫자가 없으면 결국 '남성은 사회적 강자이고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다' 라는 성차별 담론의 대전제 자체가 지속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안티/포스트페미니스트들을 설득할 방도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아무리 '남성은 강자이니 남성에 대한 멸시는 혐오가 아니라 저항이다' 라고 외쳐도, 남성이 강자라는 대전제 자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남성들은 여전히 멸시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도 이런 상황을 원하지는 않지만, 상기한 여러 한계점들로 인하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이렇게 차별이 존재합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잡고 있는 강자입니다!"를 입증할 근거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이는 차별이 없어졌음을 주장하는 포스트페미니즘 진영 역시 똑같이 해당되는 부분이다. 성차별의 실태를 파악할 적절한 측정 지표가 없다 보니, 차별이 있음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진영처럼, 이들 또한 차별이 없어졌음을 객관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 이들도 유리천장 같은 '숫자 친화적' 인 이슈 외에는 전부 자기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경험을 달리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설득은 실패하게 된다.

차별의 실태를 숫자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이점은 사회의 일반적 문제와 개인의 특수한 문제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귀분석의 경우 도출된 회귀선으로 얼마나 많은 오차가 설명되는지 판단할 수 있고, 분산분석의 경우 급간분산과 급내분산이 서로 얼마나 구분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남성들이 사회적 강자라고는 해도, 세상에는 여성들의 멸시로부터 취약한 남성 개인들이 분명 존재하고, 기득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남성들도 존재한다. 이것이 그 남성 개인의 특징인지 아니면 남성 집단 전체의 특징인지 구분하려면 결국 통계가 있어야 한다. 숫자를 통해서 남성들이 실제로 현저한(significant) 수준에서 사회적 기득권을 획득하였음이 확인된다면, 그때는 감히 반론을 펼치기가 힘들다.[13]

6. 관련 문서



[1] 이준효. "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철학적분석 45 (2021): 61-95.[2] 이 전략이 맞다고 가정하면, 도쿄전력 여직원은 SM클럽에서 일 하다가 본인 마음에 드는 남자 손님 3~4명만 골라서 매춘 비용을 깎아줬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매수자 중 한 명은 불법체류 외노자였다.[3] Brod, H. (1998). To be a man, or not to be a man: That is the feminist question. In T. F. Digby (Ed.), Men doing feminism (pp.269-292). NY:Routledge, New York.[4] 첨언하자면 "어차피 너네들이 한국 땅에서 한남으로 살아가는 이상 이미 글러먹었으니까 알아들었으면 그냥 가서 재기해 ^^" 같은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은, 자기들이 비판해 왔던 "여자들은 DNA 수준에서 수학 과학을 못 하는 천성으로 타고났으니까 가르칠 필요도 없다!" 는 생물학적 결정론적인 배경의 성차별 발언과 똑같은 수준으로 꼴통(...)스럽다는 말이다.[5] 성의 정치학에 오타가 난 것. 성의 정치학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추앙받고 있다.#[6] "Friedan is credited for starting the contemporary feminist movement and writing a book that is one of the cornerstones of American feminism. Her activist work and her book The Feminine Mystique have been a critical influence to authors, educators, writers, anthropologists, journalists, activists, organizations, unions, and everyday women taking part in the feminist movement."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Tributes to Betty Friedan.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May 11, 2008. Retrieved 2008-04-29. https://en.wikipedia.org/wiki/Betty_Friedan#cite_ref-NowTribute_74-0에서 재인용[7] 20대 남자의 남성혐오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남성 차별론을 부정하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페미니즘 측과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쪽에서는 남성을 기본적으로 사회적 강자이며 차별받지 않아온 대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여혐과 남혐의 양상은 다르다, 현재 청년 남성층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면서 '실제 2030 청년 남성들의 삶이 어떠한지 고민을 안하면서 반페미니즘 정서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페미니즘이 남성혐오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경제 문제, 취업난 등 다른 곳에만 원인이 있다는 식으로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남성을 사화적 강자로 보는 페미니즘의 시선과 반하는) 사회적 약자로써의 남성과 남성혐오 그 자체, 그리고 남성혐오를 일으킨 여성 측의 문제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든 접게 만들려고 유도한다.[8] 여성가족부가 공직세계에서 보잘것없는 힘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인식조사 외에는 행정활동의 정당화가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인식이 문제라면 인식을 바꾸는 교육을 해야 할 텐데, 교육/특강 관련 사업들치고 큰돈 들어가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시피하다. 게다가 여가부 3대 업무분야가 양성평등/일탈청소년/모성지원 이렇게 나눠지는데, 평등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도 각각 교육부보건복지부에 상당 부분 겹치는지라 뭘 크게 해볼 수가 없다. 자기들도 다른 부처들에서 놓치는 사각지대를 뒤치다꺼리한다고 자조할 정도.[9] 예컨대 한 명의 남성 초보운전자는 그 한 명의 문제로 남지만, 한 명의 여성 초보운전자는 여성운전자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발견된다 해도, 그럼 초보운전자를 공평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주관적 세계에서는 남성이 강자가 아닌 것이 되냐는 의문이 남게 된다.[10] 완력이 더 강한 입장과 사회적 강자의 입장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11] 오해 소지가 있어 첨언하자면, 오히려 집안이 가난하고 성장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 그런 결과가 나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2] 예컨대 나이 지긋하신 5060 세대 남성들의 경우, "그때만 해도 우리 누나가 나보다도 훨씬 공부를 잘 하는 분이셨는데, 나랑 내 동생들 먹여살려야 한다면서 학업을 포기하셨었지..."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13] 사실, 가장 근본적이고 교과서적이며 정석적인 방법은 결국 남성과 여성이 서로간에 삶의 경험을 공유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상대방이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상대방도 자신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음을 이해하고,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 성별만의 고유한 어려움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숫자가 없더라도 모두가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이상에야 평등의 대의에 다같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성차별의 존재를 입증할 수치상의 '스모킹 건' 을 찾는 것보다는 더 건설적이다. 지금껏 무한대립을 반복하던 한국 남녀의 이해관계를 동일하게 하기 때문에 진영논리를 펼치는 자들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제안이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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