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30 12:20:22

김민산

김교삼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2년 2월 18일, 오늘날의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 해당하는 선산군 평성면에서 독립운동가 해산 김정묵(海山 金正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교삼(金敎三)이다. 1926년 자식 없이 사망한 숙부 김사묵(金思黙)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한편 김정묵은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법정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하고 1918년에 일시 귀국하여 9월에 가족 전원을 데리고 만주 봉천성으로 다시 망명하였다가 1919년에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1920년에 베이징 집의(集義)소학교를 거쳐서 중국 사립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베이징 화북대학을 졸업했다.

20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투신, 양진곤(楊振崑)이란 가명으로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1932년 10월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 명의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 1933년 4월 1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4월 23일 졸업식에서 중국어로 생도대표 답사도 하였다. 이후 학교에 잔류하여 교무요원으로 사업하였으며 교관 자격으로 2기생들을 가르쳤으며 1935년 4월부터 9월까지 양민산이란 가명으로 3기생들을 상대로 정치학, 당 조직선전을 가르쳤다.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창설되면서 경제부에서 사업하면서 김원봉을 보좌했다. 1936년 4월부터 1937년 2월까지는 강서성 성자현에 있는 남의사 고등훈룐소에서 교육하받았다. 1937년 3월에 난징으로 돌아와 김원봉의 비서가 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김대륙[1], 양진곤, 양민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후 김민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7년 독립운동가 장건상(張建相)의 장녀 장수원(張守遠)과 결혼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에 입학하였으나 병환을 이유로 중도 퇴교하고 의창에서 선전활동을 하다가 한커우로 피신하였다. 1938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 5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일제로부터 즉시 체포해야 하는 엄중주의인물로 지목되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1939년 말 제3지대 정치지도원이 되었으며, 1940년에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충칭으로 이전하면서 잠시 충칭으로 갔다가 11월 확대간부회의에서 화북 진출이 결정되면서 3지대 정치조리원에 임명되었고 팔로군이 장악한 태항산 지역으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되면서 유수대(留守隊)에 배치되었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 공세가 시작되자 김두봉과 함께 엔안으로 후퇴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될 때 집행위원에서 탈락했으나 그 산하의 옌안분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1월, 태항산에 있던 조선청년혁명학교가 옌안으로 이전한 후에 12월에 정치교관이 되었다. 1945년 6월, 독립동맹 연안분맹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처음에는 중앙본부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김민산을 본명으로 사용했다. 6월 26일, 신민당 1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 중앙상무위원 및 조직부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2월, 애국투사후원회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북로당 대표로 참석했다. 이때 사위 장건상을 오랜만에 회후했으나 장건상은 북에 잔류하지 않고 남한으로 돌아갔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49년 4월 19일, 최고인민회의 1기 3차 회의에서 함경남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1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2년 7월, 토론토에서 열린 18차 국제적십자대회에 북한 대표단원으로 참석했으며 유엔군이 세균전을 벌이며 포로들을 학대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2] 이때 중국 여성 통역이 그의 말을 영어로 통역했는데, 김민산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마구 덧붙여서 제지를 받았다. 이후 캐나다 유학생 3명과 담화를 가졌는데, 신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왜 공산당은 수백만명의 동족을 죽게 한 잔혹한 공격을 했는가라고 따지자 미국인들의 선전이며 남조선이 침공해온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후 반탐오 반낭비 운동이 진행되면서 유영기에게 함경남도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사회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사회부장도 겸하였다.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사회부장에서 해임, 김용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9월 9일, 국가건설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55년 1월, 건설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 국가검열성 부상으로 조동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956년 5월 국가검열성 부상에서 해임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12월 조국전선 2차 대회에서도 탈락했다. 그래도 8월 종파사건과 1차 당대표자회에서도 생존하는데 성공했으나, 1958년 10월, 장평산이 숙청되면서 김일성에게 직접 폭동음모자로 지목되었는데 처참하게 숙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영범(2020), 民山 金敎三의 민족운동과 광복 후 정치활동 - ‘父子ㆍ夫婦ㆍ丈壻 독립운동가’였음에 주목하며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5.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1] 참고로 김대륙은 김정묵이 중국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인데, 일본에서는 김민산과 김대륙을 동일인물로 혼동하기도 했다.[2] 참고로 김영범은 자신의 논문에서 각주로 미군이 세균전을 한게 맞다는 뉘앙스의 얘기를 덧붙였는데 소련(1998)과 중국의 문서 공개(2013)로 미군 세균전 주장은 개구라로 밝혀진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