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10 00:06:05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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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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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약칭 NSDAP
Nazi Party(멸칭)
영문명칭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한글명칭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창설자 안톤 드렉슬러
창당일 1920년 2월 24일
해산일 1945년 10월 10일
역대 당수 안톤 드렉슬러 (1920년 ~ 1921년)
아돌프 히틀러 (1921년 ~ 1945년)
마르틴 보어만 (1945년)
이념 나치즘
범게르만주의
정치 스팩트럼 극우
당원 수 20명 (1920년)
850만명 (1945년)
1. 개요2. 명칭 문제3. 역사
3.1. 1919~1923: 창당 초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입3.2. 1923~1926: 뮌헨 폭동의 실패와 히틀러의 투옥3.3. 1926~1932: 대공황의 혼란을 틈타3.4. 1932~1933: 절체절명의 위기3.5. 1933/1: 집권3.6. 1933~1939: 독재 정권의 군림3.7.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몰락3.8. 1940년대의 부활 시도3.9. 현재3.10. 역대 선거 결과
4. 인적 구성과 성향
4.1. 나치 당원들의 사회 계층4.2. 정치적 성향
4.2.1. 제3의 위치
4.3. 도덕적 해이
5. 전후 인식
5.1. 영국, 프랑스, 미국 및 서유럽5.2. 오스트리아5.3. 러시아와 동유럽/발칸반도 국가들5.4. 북유럽5.5. 아시아5.6. 남아메리카
6. 기타
6.1. 제복과 집회, 다큐멘터리
6.1.1. 제복6.1.2. 건축6.1.3. 영상
6.2. 동물 사랑6.3. 창작물에서6.4. 성적 판타지
7. 관련 인물8. 관련 문서
8.1. 사상8.2. 조직8.3. 상징8.4. 사건
9. 작품10. 기타

1. 개요

파일:attachment/nazi2.jpg
...유태인 추출 이래 나치 독일 정부의 "순수" 보존열은 기구한 바 이 경향은 근래 점차 히스테릭화하여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 내무부 장관은 최근 전국 오백의 호적 등기소에 대하여 "독일 민족의 순수성을 외국 인종과 혼합하지 않는 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국민 사람사람마다 선조와 근친자에 반한 엄중차 상세한 조사를 하여 종족 카드를 작성할 일"이라고 반포하였다. 이 결과 금후 독일 국민은 소위 "티펜뿔라드(sippenblatt)"라고 칭할 혈통 증명의 카드를 감찰로서 종시 몸에 갖고 선조의 혈통 순수성을 어느 때나 증명하도록 되었다 한다.
1934년 11월 3일, 동아일보, "전 독일인의 혈통카드(全獨逸人의 血統카드)"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창설자는 안톤 드렉슬러. 당가는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2. 명칭 문제

  • 한국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國家社會主義獨逸勞動者黨)이름만 보면 대놓고 공산당이다
  • 독어: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1]
  • 영어: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독일을 흑역사 속으로 집어 던져버린 정당이다. 정식약칭은 'NSDAP'. 하지만 흔히 멸칭인 'Nazi'로 잘 알려져 있다. 재밌는 건 Nazi는 나치당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쓰인 말이었다는 것이다. 속된 뜻은 수구꼴통으로, 바이에른 뮌헨에서 농부 이름으로 흔한 Ignatz의 줄임말이었다. 이곳은 나치당이 발원했으며, 지금도 우익 성향이 강한 곳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기원은 독일어에서 National이 '나치오날(Nazional)'로 읽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 독일에서 보통 줄여서 칭했고 히틀러나 골수 나치들 사이에서나 국가사회주의라고 풀네임으로 썼다. 히틀러는 줄여부르는 걸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Nation은 독일 원어로 민족을 뜻하지만 국가를 가리키기도 하는 등 서구 근대사의 특수성이 반영된 용어이므로[2] 민족으로 하든 국가로 번역하든 틀린건 아니다.[3] 일각에서는 제2제국 시절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장한 'Staatssozialismus'와[4] 혼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이 둘을 다르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애당초 역사학도나 정치학도가 아닌 이상 생소한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기존에 썼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할 이유는 없다.

민족(국가)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초기 파시스트들이 서구 "자본주의"와 "국제주의적" 사회주의 같은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반자본주의+반국제주의=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애초에 당 강령이나 정책은 여기저기서 베낀것이라 이념으로 결합한 정당이 아니며(지도자 원리 참고) 초기엔 독일 노동자당이었고 민족(국가)주의 사회주의란 유대인에 오염된 서방식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독일식' 사회주의, 노동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집어넣었다. 1차대전 후 보수혁명이라는 극우 운동이 있었는데 나치가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내 번역으론 기존에 국가사회주의로 많이 쓰였다가 최근엔 민족사회주의로 표기하려고도 하는데 본래 "국가사회주의"라는 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가르키는 용어이며,[5] 의미가 확장되어 국가를 이용하는 사회주의 전체를 가르키는 말로 확장됐다. 해외에서도 State socialism 하면 공산국가나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의미하지, 나치로 쓰는 인간들은 "사회주의"라는 당명을 근거로 나치를 좌파로 모는 극우파뿐이다. 또한 영어권에서도 나치즘이나 Volk[6](영어 표기로는 Folk), Reich(제국, 국가)을 제대로의 의미를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추세고 따라서 나치즘이나 나치당을 해외 문헌에서 검색할 땐 NSDAP Nazi로 써도 별 무리가 없다. 독일에서는 현재 NS(National Sozialistische)라는 약칭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사실, Nazi 자체가 금기어에 가깝다.

주된 사상은 쉽게 말하자면 민족, 국가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가르쳤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 전체주의 정당의 가장 강력한 사례. 하지만,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이란 슬로건도 내거는 등 결국 총통과 국가를 동일시하여 총통의 권력을 실천하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사실 나치당의 이런 권력 몰이는 선전 장관을 잘 만난 탓도 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정치 선동학은 현재에도 연구가 될 만큼 대단한 수완이었다. 실제로, 나치당의 전당대회나 행사 기록 영상을 보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웅장함과 파워에 압도되도록 잘 짜여져 있어 지금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다.

통칭 절표시, 와 간혹 혼동하는 나치의 저 유명한 엠블럼은 '만자십자장'이라고 한다.[7] 독일어로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나 '스바스티카(Swastika)'로 불린다.[8]

3. 역사

파일:attachment/nazi1.jpg

나치 집권 시의 베를린 풍경.

3.1. 1919~1923: 창당 초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입

원래 이름은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약자는 DAP였다. 여기에 히틀러가 "국가"를 더해 NSDAP가 되었다.[9]

처음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의 국력이 급격히 하락하고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사회 혼란과 불만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던 20년대 초반,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10] 뮌헨 시에서 전쟁 전 신흥 계층들이 전후 바이에른 지역 반유대 민족주의 성향인 범게르만주의에 물든 정치적 정당이랍시고 만든 조그만 단체였다. 창립자 겸 초대 당수는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라는 사람으로, 원래 직업은 열쇠 수리공이었지만 이미 독일 조국당(DVP)[11]에서 당원으로 활동하던 경력이 있었고, 경력을 살려서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등의 지인들과 함께 DAP를 창당했다. 당연히 이때부터 이미 반유대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다만 NS가 붙지 않던 시절에는 하켄크로이츠가 아닌, 단순히 녹색 동그라미에 약자를 쓴 심플한 마크를 사용했다.

사실 말이 정당이지 실질적인 능력은 아무 것도 없는 불만 많은 아저씨들의 모임 정도에 불과했다. 바이마르의 초기 혼란과 정치적 자유로 인해 여기저기서 난립하던 다른 군소 정당들과 차별화 되던 점이 없었고, 당원 수도 수십 명 정도로 웬만한 군소 정당보다도 당세가 적었다. 따라서 불만을 사회의 아무곳으로나 표출하게 되면서 극단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쇠락한 바이에른주 군부에서 지역 내부의 여러 정당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려고 여기에도 한 병사를 보냈는데...하필이면 그게 히틀러였다.

당시 나치당에 모여 있던 고만고만한 찌질이들이 이런저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걸 조사하던 히틀러는, 되도 않을 것들을 보니 열뻗쳐서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참석 당일 히틀러가 받은 이미지는 '별 시덥잖은 것들이 웃기고 있네' 수준이었던 모양.[12]

히틀러의 말빨 연설 능력은 군계일학이었고[13] 기존의 나치당원들은 히틀러의 연설에 압도되어 히틀러를 환영하였다. 히틀러도 썩 전망이 보이지도 않는 군대생활을 하느니 이쪽이 더 자기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사하라고 보낸 놈이 오히려 정식으로 가입하여 당원증을 발급받아버렸다. 당원 번호는 555번.[14] 즉, 많이 오해하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창당 멤버가 아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화려하게 걷어차고 대빵이 된 경우. 창설자였던 안톤 드렉슬러는 굴러들어온 돌 히틀러를 비난하다가 히틀러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뒤 1921년 당수에서 물러났고 1923년에는 완전히 탈당해버렸다.

일단 히틀러는 명목상 전쟁에서 철십자 훈장[15]을 받은 전쟁 유공자였고 병사 출신이라 중산층 미만 계층에서 인기를 끌만한 대중성을 지녔다. 그리고 히틀러 자신의 열광적인 연설 퍼포먼스[16]와 당시 사회 불만이 크게 번져 있던 독일의 흉흉한 분위기 덕택에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어필했다. 그러나,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치당의 세력은 별 게 아니었다.

3.2. 1923~1926: 뮌헨 폭동의 실패와 히틀러의 투옥

하지만 히틀러는 나치당 집회시 다른 정당의 정치 깡패에 맞서고 나치의 세를 펴기 위하여 자신의 명령으로 "돌격대"를 창설하고 정치폭력배 집단을 통해, 타 정치 집단에 대한 무력 시위를 일삼으면서 천천히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시민들 앞에서 돌격대를 행군시키는 등 일반 시민들에게도 뭔가 다른 집단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나치당이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되자 돌격대는 사회혁명용 반란군 임무를 띄게 된다.

당시 나치당이 활동하던 바이에른 지방은 독일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지역이었다. 프로이센을 제외하면 독일제국 내에서 가장 큰 지방으로 다른 독일지역이 개신교 지역인데 반해 바이에른은 가톨릭이 강세인 지역이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색과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면도 있고, 한편 이런 분리주의 성향에 반발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불릴만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대전 패전 이후 극좌 세력의 무장 봉기로 "바이에른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지만, 불과 6개월만에 (중도좌파) 사민당과 (중도우파) 중앙당의 연립 중앙정부의 주도로 군부와 극우 민병대가 다시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극도로 혼란한 지역이었다. [17]

이런 상황에서 일부 세력들은 그들이 보기에 유약한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다른 우익 세력은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바이에른 지역을 장악한뒤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르면 난립하던 바이에른 지역 우익 세력과 민병대 사이에 군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 작센지역에서 독일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 과격파가 합작하여 지방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베를린에선 우익 계열 민병대[18] 카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데 자극받아서 나치당도 바이에른에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미리 포섭해놓은 바이에른 주정부 높으신 분들과 검찰 경찰 나으리들이 중앙정부의 협박 때문에 나치당에 배신을 때리고 쉽게 제압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맥주 홀 폭동 사건(Munich Beer Hall Putsch). 마침 바로 전해인 1922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는걸 보고 우리도 '바이에른을 장악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해서 독일 정부를 한번 뒤집어 엎어볼까?' 하는 아주 엉성한 계획을 시도했지만, 순식간에 망하고 히틀러는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체포당한다. 그러나 나머지 반란세력들은 주요 참여자라도 듣보잡들은 체포하지 않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인물들이 재판에서 언플로 전국구로 뜨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재판 과정에서[19] 판사 앞에서 열광적으로 현재 독일의 문제와 승전국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에 판사가 넘어가 히틀러의 형량을 줄여주었다. 반역죄는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판사를 잘 구워삶아서 비교적 가벼운 금고 5년을 선고받고 실제론 고작 9개월 복역하게 된 히틀러는 감옥 내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쿠데타 실패, 주요 인물의 투옥으로 세력이 열악했던 나치는 붕괴 위험에 처한다.

히틀러는 무료함을 달래고 붕괴 위기에 처한 당을 재결집하려는 뜻에서 옆 방에 투옥된 루돌프 헤스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쓰도록 시켜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자서전 성격의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독일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히틀러는 후에 실제로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최초의 쿠데타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실패했고, 이후의 숙청 등은 이미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20]에 발생한 일들. 독일 국민들이 전범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들이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라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이 동안의 나치당은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대부분의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후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지향하면서 히틀러와 갈등이 생기고 히틀러의 정권 장악 시도에도 반발하다가 결국 쫓겨나서 34년 암살당했다.

3.3. 1926~1932: 대공황의 혼란을 틈타

파일:attachment/nazi3.jpg
Arbeit, Freiheit und Brot(일자리, 자유[21] 그리고 빵)
나치당 초기의 선거 포스터에 써있던 표어이며 당시의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후중상설까지 믿고 있던 대다수 독일 민중들을 꾀는 데 이보다 가장 적합한 선거구호는 없었다.

출소 이후 히틀러는 몇달간 시골로 돌아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대선에서 그를 지지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대선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뒤 정계로 돌아왔다. 돌격대의 폭력 시위와 정치 투쟁이 계속되고, 히틀러는 국민들의 좌절감과 갈 곳 없는 분노에 방향을 제시했다. 집권 전이나 후에나 나치당의 일관적인 정책은 인종정책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독일 국민들이 반유대주의 자체에는 공감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나치당의 지지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나치당은 지지율은 미약했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돌격대의 숫자와 조직이 늘어났고 농촌의 농민단체와 군에는 나치 과격분자들이 잠입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1928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이러한 조직력은 사회 불만과 합쳐져 지지세로 연결된다.

한편 겉보기에 이념상 나치당의 반대편에 섰지만, 바이마르 체제의 붕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 또한 대대적인 약진을 시작했다. 1929년 월가의 주가 폭락 이후 세계경제가 대공황으로 파탄이 나면서 1928년 12석였던 나치가 1930년 선거에서는 104석(제2당)이 되었고, 공산당도 81석으로 역시 부상했다. 좌파사민당 지지자들조차 공산당에 부정적이었고 독일 내 자유주의 성향 지지자나 독일 내 8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을 선택하느니 나치당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32년 선거에서 공산당은 89석을 차지하지만 나치는 그때 196석 즉, 제1당이 되었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 온건 및 중도적인 사상보다는 좌우로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나라가 제대로 미쳐 돌아가는 상태.

이전 바이마르 체제 10여년 처럼 자유주의 우파 정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좌우 대연정을 꾸민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의회 구성이 서로 체제 절멸과 체제 전복 드립이나 치는 나치당과 공산당 의석 수가 늘어나면서 기존 정당 사이에선 연립정부가 들어설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공산당은 나름대로 정치 불안이 장기화 되면 체제 전복이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 성립하는 내각마다 불신임안을 냈다. 거기에 찬동한 건 다름아닌 나치당...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제시한 '상호 불가침' 원칙을 맹렬하게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다'는 스탈린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독일 사민당을 공격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의 산물로 혁명 대상이라고 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건 사민당과 가톨릭 중앙당 등 중도적 정당이나 몇 안 되는 자유주의 정당들 정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례대표제로 인해 군소 정당이 난립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은 국회 내에서 37%를 차지하였을 뿐이지만 압도적인 원내 1당이며 또 다른 공화국 체제의 반대자 공산당을 합치면 과반수가 넘었고 이들은 모든 정부를 불신임할 작정이었다.[22] 거기다 히틀러는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40만의 돌격대가 봉기할 것이라고 반쯤 협박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극우를 비롯한 우익 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회의적이었고 연합국의 '강요'로 이뤄진 체제로 인식했다. 극좌 공산당은 나치가 부상하자 혁명론과 반자본주의 성향이 자기들과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우파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독일 우파인 종교계, 토지 귀족, 군대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는 강력한 우파 정당을 원했던 지라 성향은 제법 의심스러웠지만 히틀러의 합법적 정권 추구 선언 이후에는 나치당을 이용하는게 안전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집권은 바이마르 체제의 모순, 경제난, 히틀러 본인의 정치력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봐야한다.

이 때의 상황을 참회하며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는 '전쟁책임고백서'를 집필하며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지었다. 이 시는 정치적 무관심의 위험을 경고할 때 즐겨 인용된다.
나치가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3.4. 1932~1933: 절체절명의 위기

1932년 7월의 유례없는 대승으로 37%를 득표한 나치당이었지만 정권 장악에는 실패하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 우익은 히틀러와 철천지 원수가 된 상태였으므로 연정은 꿈도 못꾸었고 히틀러 본인도 줄곧 단독집권을 고집하였으나,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저 득표 수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론 이룩한 수치 자체는 대단하다. 바이마르 체제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이 불참한 1919년 첫 총선 이후 30%를 넘은 적이 없다. 25%도 두번이고 다른 선거에선 20% 초반이었다.즉 1919년 총선 이후 독일 정당 중 최대 득표율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과반수를 넘으려면 14%를 더 채워야 했고, 반복하지만 히틀러 본인부터가 계속 단독집권에 집착하였으므로 크게 의미가 없었다.

히틀러의 집착은 나치당의 상승세가 매우 가팔랐던 것도 한몫한다. 불과 2년만에 의석 수를 두배로 불려냈으니 다음 선거면 단독집권도 꿈도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했는지, 공산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에 나치당이 동의해버리고 총선을 밀어붙여 11월에 또 한번 선거를 치뤘다.

문제는 나치당이 이미 끝물을 타고 있었단 점이다.

1932년 11월의 선거는 나치당의 대패로 끝났다. 물론 33%의 득표율로 여전히 높은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야망으로 더 이상의 집권 희망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유권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원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유명 인사이기는 했지만 결국 나치당은 근본적으로 군소 정당이었다. 2%의 득표율을 37%로 불리고 300만 돌격대를 키우느라 나치당은 단기간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으며, 특히 3년간 선거를 대선 총선 도합 4번이나 치르면서 빚이 잔뜩 늘어난 상황이었는데,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집권을 하지 못하니 후원이 끊어지고, 후원이 끊어지니 선거에 돈을 쓰지 못하고 득표가 주는 악순환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디까지 추락할지 아무도 몰랐던 독일 경기가 1932년 봄에 바닥을 치고 점차 회복세에 있었다. 11월 총선 당시 실질적인 집권당이었던 보수 우파 독일국가인민당은 이 덕을 톡톡히 보아 공산당과 함께 해당 선거에서 유이하게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히틀러로 똘똘 뭉쳤던 나치당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레고어 슈트라서 일파는 더이상 히틀러에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고 선거 후 집권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총리와 결탁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3.5. 1933/1: 집권

문제는 여전히 나치당이 32%의 의석 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슐라이허 정권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슈트라서 일파를 끌어들이고 나치당을 분열시키려던 시도는 슈트라서 본인이 휴가를 간 사이에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끝장났고, 그렇게 자기 당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히틀러는 총리 자리가 아니면 절대로 연정을 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좌파 사민당하고 연정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보수 우파는 슐라이허 정권보다는 전임 총리인 프란츠 폰 파펜을 밀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슐라이허가 물러나는건 기정사실화되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누군가가 정권을 잡기는 해야 하겠으나, 히틀러가 요구하는 단독 집권은 불가능했고, 파펜이 다시 취임하면 또 불신임에 붙여지고 사태가 루프할 가능성이 농후했으며, 좌파인 사민당은 그냥 처음부터 논외였다.

결국 파펜의 주도로 보수 국가인민당이 가담한, 나치 각료가 총리 포함 세 명뿐인 불안정한 우익 연립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프란츠 폰 파펜 항목 참조. 총리는 히틀러였고, 경찰권을 장악하는 내무 장관도 나치기는 했으나, 나중에라도 수틀리거든 파펜이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를 움직여 총리를 갈아버리고 도로 자기가 취임하면 그만이고, 이렇게 히틀러 정권이 무너진다면 당초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던 나치당도 함께 무너질 거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즉 히틀러는 총리 취임을 위해 정치 생명을 건 상황이었고, 총리에서 물러나면 그의 정치 생명도 같이 끝장나는 판이었으며, 그를 위해서는 파펜에게 아주 자알 보여야만 했다. 적어도 파펜과 보수 우파는 그런줄 알았다.

3.6. 1933~1939: 독재 정권의 군림

비록 힌덴부르크를 구워 삶아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보수 우파의 후원이 없으면 곧바로 무너질 처지였다. 따라서 히틀러는 재빠르게 정권의 독재화를 추구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과 동시에 의회를 해산한다. 그리고 선거를 불과 1주 앞둔 때 네덜란드 출신 사회주의자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벌이고,[23] 용의자로 몰려 나치당에게 반대파를 공격할 기가 막히게 적절한 건수를 제공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돌격대에게 대놓고 얻어맞으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24]

나치는 이 사건의 덕을 크게 보아, 의회에서 44.5%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했으나 여전히 과반수에 미달하였으므로 히틀러는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 정권을 세웠다. 곧바로 히틀러는 수상에게 모든 입법력을 넘기는 '수권법'을 세웠는데, 사민당과 공산당의 반대는 예상된 것이었고 따라서 필요한 2/3의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를 받아내고 좌파들을 체포, 차단했다. 결국에는 가톨릭 중앙당은 물론이고 동맹이었던 독일 국가인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 당시까지도 최대 정치 세력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방조직들(국기단 등)은 무장 봉기를 준비했지만, 중앙당 지도부가 무기력하게 해산하면서 묻히고 말았다.[25]

마침내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1934년 사망하자 히틀러는 자신의 지위를 반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 일명 '퓌러(Führer, 지도자 혹은 영도자)', 내지는 총통 자리에 올랐다.[26]

나치는 집권 즉시 수용소를 만들었다. 실제로 반대파와 유태인과 집시, 정신질환자장애인 등을 죄다 수용하고선 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서 조직적인 학살 계획을 세우는 등 그야말로 권력욕에 극에 달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강력한 권력과 사회 안정 능력을 본 주위 유럽 국가들은 이를 부러워하며 나치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승전국인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만약 우리가 독일 처지였으면 히틀러 같은 인물을 바랐을 것'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27] 처칠 전의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 또한 히틀러와의 회담 후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온 유럽이 막장 상태였으니 저런 말이 나오게 된 것.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로 이식된 민주주의가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체제라고 주장하며, 집권 이전부터 그 폐지를 주장해 왔다. 대신 하나의 총통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결된 유기체적 민족 집단화를 꿈꾸었다. 자연히, 두뇌에 해당하는 총통과, 그 명령을 하달하는 신경에 해당하는 관료의 관계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하관계적 관료주의나치당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보수적인 관료들이 공무원들로서 질서와 안정을 추구한다면 나치 당원들은 급진적인 민족주의로 무장한 정치 집단이기 때문. 실제로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했던 초기만 해도 정부 내각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관료 집단이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나치 집권 이후 일부 장관직이 나치당원에 넘어가고 정부 조직 곳곳에 나치당원이 침투했음에도 기존의 관료 조직과 보수주의자들은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히틀러 역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원했기에 이러한 국가 관료 조직을 유지, 강화한다. 특히 대표적인 관료 집단인 독일 군부 역시 히틀러는 손을 대지 않고 철저히 보호해 준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소련에서처럼 당이 관료들을 향해 스탈린식의 정치적 대숙청이 일으키거나 당에서 군부에 나치즘을 신봉하는 정치장교를 파견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례로 히틀러는 집권 직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치 당원과 나치 이데올로기를 군과 관료 조직에 침투시키는 데 앞장섰던 돌격대 돌격대와 그 대장 에른스트 룀[28]도 당의 호위 조직인 SS를 동원해 제거해 버렸다(장검의 밤). 즉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당원들이 정치적 이유로 국가 공무원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은 억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 역시 언제까지 국가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였다. 국가 관료들은 대체로 히틀러의 의지에 순응했지만 그들 나름의 논리와 법과 절차를 고수하고는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모든 공적인 행정 절차와 법 위에 서고자 했고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키기위해 행정부의 기능마저 약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결국 30년대 후반에 이르자 히틀러는 기존 관료들을 놔두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하위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직책을 맡기고 특수 조직을 위임하면서 기존 관료들이 갖고 있던 온갖 권한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일례로 경제 전문가였던 재무부 장관 샤흐트을 냅두고 헤르만 괴링에게 4개년 계획을 맡긴다던가, 행정 전문가였던 내무부 장관 프리크를 냅두고 친위대장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경찰 조직을 주기까지...(유태인 학살 당시 SS게슈타포 두 조직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었던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지도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부총통실과 마르틴 보르만 등의 비서진들이 권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급기야 1938년에 이르러서는 구 관료주의적 성향의 장관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하고,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당 관료들이 수많은 직책을 겸직해 가며 모든 걸 해먹게 된다! 여기에는 군부도 예외가 아니라서,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지자 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의 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많은 수의 장성들을 물갈이한다. 여기서 괴링은 원수가 되어 군에서 가장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참모총장에는 말 잘듣고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된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치당도 보수적인 관료주의자도 아니었다. 괴벨스를 위시한 나치당은 국가의 나치히틀러 숭배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선전 기관으로 자리매김했고, 국가 조직은 히틀러의 명령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사실상 히틀러의 수족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한편 총통과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소수의 나치 당원들은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국가의 온갖 권익을 얻어 히틀러와 함께 국가를 좌지우지한다. 이들이야말로 최후의 승자인 셈. 결국 이러한 교묘한 술책 덕분에 영화 《몰락》에서 볼 수 있듯 전쟁 말엽에 히틀러가 신경쇠약으로 맛이 가도 주변 관리들은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고 독일이 망할 때까지 그에게 복종한다. 반면 그간 히틀러의 온갖 총애를 받고 권력의 종점에 오른 괴링 등 소수의 고위 당원들의 행태를 보면(...)

3.7.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몰락

파일:Bundesarchiv_Bild_183-1987-0703-507,_Berlin,_Reichstagssitzung,_Rede_Adolf_Hitler.jpg

나치는 독일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히틀러가 곧 독일 국가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29] 나치당의 지도자 사상에 따라 히틀러는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나치당은 어떤 법률로도 그 위치가 규정되지 않았으나 히틀러의 의지를 전파하는 초국가적 조직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독일의 관료 정부보다 나치당이 우월한 조직으로 여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정복지에 나치즘을 전파하고 친나치 정부를 세웠다. 정부와 군부의 요직은 나치 당원, 혹은 강력한 동조자로 채워졌다. 반나치 정치인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총통의 친위대사병으로 활용해 정규군과 대등한 수준의 조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독일의 지방자치 조직은 마비되었고, 나치당의 지구당이 이를 대체하다 시피했다. 히틀러의 철저한 내부 숙청과 프로파간다 등으로 인해 전쟁에서 점점 불리해지고 영토가 적군에게 넘어가는 와중에도 나치의 중앙 통제력은 살아 있어서 연합군에게 항복하려는 독일 민간인들을 처벌하거나 고립된 지역에서 베를린까지 다녀가는 등 연합군이 점령할 때까지 나치의 통제력은 살아있었고 이는 히틀러가 죽고 되니츠가 집권한 뒤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패망과 함께 조직으로서의 나치는 파멸하였다. 연합국은 독일을 미치광이로 만든 이 정신나간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독일인들 역시 나치를 금기시하였고, 살아남은 나치 핵심 인사들은 남극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국가로 도주하여 정체를 숨겼다. 9월 10일에는 법률에 의해서 금지되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 의해 범죄 조직으로 인정되어 1945년 10월 10일, 공식 해산된다.

3.8. 1940년대의 부활 시도

서독과 동독으로 독일이 분할되고 냉전이 시작되자 나치당의 잔재들은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Socialist Reich Party, SRP)[30]를 만들어 부활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국방군 육군 소장까지 오른 오토 에른스트 레머[31] 같은 나치 광신자들의 서포트를 받아 니더작센(Niedersachsen) 주에서 36만 지지자를 얻고 주 의회에서 16석을 차지하며 나름 지지를 받았으나, 연방정부에서 정당해산 심판제도로 위헌정당 판결을 내리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들을 해산시킨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그 목적이 민주주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복수정당제의 부인
2. 당내 조직과 그 운영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지도자 원리에 기초
3. 당원의 활동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비롯하여 그밖의 기본권 경시

한편 동독에서는 옛 나치당 인사들을 회유시켜 독일국가민주당이란 관제야당에서 연명하도록 했다. 동독 인민의회에서 52석 정도를 분배받았으며, 통일 후 동독 자민당(LDPD)과 함께 서독 자민당(FDP)에 흡수되었다.

3.9. 현재

그 후 오랫동안 나치는 철저한 금기로서, 일부 소규모 정치 집단이나 지하 조직으로 존재하면서 간혹 가다 사고를 터트리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32] 다만 지하에서 남아있던 떨거지 추종자들이 나머지 극우파와 국수주의, 인종주의 패거리들을 규합해 민족민주당(약칭 NPD)을 설립하고 활동하곤 있다.#

기본적으로 제노포비아민족주의는 공통 분모로 지니고 있지만, 나치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회 민주주의 부정[33]이나 개인 숭배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치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03년에 불법 정당으로 제소되었다가 이러한 이유로 살아남았다. 극우 테러집단인 NSU가 외국인과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2013년에 연방상원 주도로 다시 한번 NPD를 불법 정당으로 찍어서 해산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연방하원에서는 적극적이지 않아서 성사될지는 의문이다. 다행인점은 독일을 위한 대안이 표를 받는 일은 있어도 NPD가 표를 받는 일은 아주 적다는 것. NPD는 지방의회에서만 가끔 의석을 확보했고 연방의회에서는 창당이래로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나치 전범인 에리히 프리브케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로마 외곽 알바노 라지알레에서 장례식이 치뤄질 예정이었다가, 시민들의 항의로 그 시신을 로마 인근 군 비행장에 방치했다.

2010년대 들어선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유럽 난민 문제로 인해 페기다독일을 위한 대안과 같은 네오 파시즘 인종차별 계열 조직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중이다.

3.10. 역대 선거 결과

하원 선거
선거 년도 투표 수 % 획득 의석 +/- 비고
1928 810,127 2.6 12/491 +12
1930 6,379,672 18.25 107/577 +95
1932년 7월 13,745,680 37.27 230/608 +123
1932년 11월 11,737,021 33.09 196/584 -34
1933년 3월 17,277,180 43.91 288/647 +92
1933년 11월 39,655,224 92.11 661/661 +373 단일합법정당
1936 44,462,458 98.80 741/741 +80 단일합법정당
1938 44,451,092 99.01 813/813 +72 단일합법정당
대통령 선거
선거 년도 후보 첫 번째 결선투표
투표 % 투표 %
1925 에리히 루덴도르프 지지 (1.1%) 에리히 루덴도르프 지지 (48.3%)
1932 아돌프 히틀러 11,339,446 30.1% 2위 13,418,547 36.8% 2위

4. 인적 구성과 성향

4.1. 나치 당원들의 사회 계층

나치당 멤버들은 죄다 저학력자 하층민 깡패들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치 하면 돌격대 깡패를 떠올렸기 때문에 인적구성상 수가 많은 돌격대의 이미지를 나치의 이미지로 착각하게 되는데 먼저 돌격대와 나치 당원을 구분해야 한다. 애초에 돌격대는 1924년 맥주홀 폭동 이전에는 나치당 하부 조직이 아니었다.

1925년 나치당이 재건되며 명목상으론 나치당 하부 조직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히틀러의 직속 조직이라서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돌격대원들은 "우리는 제3제국의 군인(?), 나치 당원은 민간인(?)임!" 하면서 전혀 통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당원들의 입당비와 매월 당회비로 운영되었는데 돌격대는 나치당 집회에서 경비를 서주면서 돈을 받아먹었지 당비를 내는 당원이 아니었다. 물론 돌격대 지휘자급들은 나치 당원이나 나치당 당직과는 겸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일반 돌격대원 상당수는 나치당원이 아닌 셈이다.

또한 돌격대도 처음에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루돌프 헤스가 대학생 100인 모임을 만들 정도로 후기 이미지와 전혀 다르며 이후 돌격대가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군대처럼 조직을 만들어 나갈 때 지도자급은 대부분 제국시절 장교 출신이며 패전 후 자유군단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었다. 초기 돌격대에서 활약한 리터 폰 에프 장군과 에른스트 룀 이전에 돌격대를 이끌던 페퍼 폰 잘로몬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폰(Von)자 들어가는 귀족 출신이었다. 더 높으신분으로 바이마르 후반에는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이탈리아 왕의 사위이자 헤센-다름슈타트 공국의 필리프 왕자도 돌격대에 가입한다. 물론 돌격대의 하부 인적자원들은 대부분은 중하위 계층 사람이었던 건 사실인데 패전 후 초인플레이션대공황이 발생하며 바이마르 시절 독일 내에 부랑자나 실업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일 평균에서도 그닥 많은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나치당 초기 구성원을 보면 자물쇠 수리공 안톤 드렉슬러가 창건자라지만 다른 멤버들 면모로 디트리히 에카르트(문학가),[34] 고트프리트 페더(엔지니어 출신, 후에 베를린 공대 교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35] 카를 하우스호퍼(뮌헨대학 교수), 한스 프랑크(변호사) 등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 모임 툴레 협회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루돌프 헤스도 툴레 협회 출신이다. 바이에른 출신이지만 후에 북독일에서 활약한 당내 행정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약사 출신으로 후에 제약회사 부사장을 지냈다. 나치당에는 박사 학위자도 빌헬름 프리크(법학)나 프리츠 토트(공학)처럼 괴벨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괴벨스 수하의 선전부 직원으로 빠지는 나치당 베를린 관구와 나치당 선전국 멤버들은 350명 중 절반 이상이 대졸자요 박사학위자도 상당수였다.

제3제국 시대 나치당 지도부의 사회 계층을 보자면 히틀러는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지만 세무서장의 아들[36]로 프티부르주아 출신이며 헤르만 괴링나미비아 총독의 아들에다 역시 부유한 집안이었고, 루돌프 헤스는 해외교포 출신으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고 둘다 전쟁때 공군장교라 아비투어(대학입학 시험)이 면제되어 뮌헨대학 진학이 가능했지만 괴링은 그냥 스웨덴으로 가서 재벌 여자와 결혼하고 헤스는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툴레 협회 인맥들과 나치당에 가입한다. 힘러는 농경제학 석사 출신이고, 나치에서 농업 분야를 맡았던 발터 다레는 농학 박사과정 중퇴로 역시 석사학위가 있다. 괴벨스야 널리 알려진 박사님이고...로젠베르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건축가, 내무 장관 프리크는 앞서 소개한대로 법학박사, 발터 풍크는 나치당에서 후에 경제 장관이었지만 원래는 언론인 출신이다. 초기 히틀러의 후원자요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낸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무역상이면서 무려 하버드 졸업생[37]이며, 히틀러 유겐트를 이끈 발두어 폰 쉬라흐는 자기집도 잘 살았지만 외가가 미국서 은행가 집안이었다. 괴벨스 밑에서 선전부 차관을 하다가 후에 히틀러의 유언에서 힘러 대신 친위대장으로 임명된 카를 한케는 전직 고교 교사였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법대를 나와 법학 박사와 변호사를 했으며,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주인공인 베셀도 원래는 법대생이다.

중졸자인 히틀러와 그나마 대화가 통해서 총애받은 마르틴 보어만도 고등학교는 졸업했다.[38]

이후 나치당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나치 당원이 늘어나게 되는데 인터넷 출처의 또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당원들 대부분은 교사, 공무원, 소상공인 출신이 대다수였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나치당 초기를 지나 정권을 잡기전에도 나치당은 '공무원 당'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교사 공무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39] 노동자 계층 출신은 당명과 괴리가 클 정도로 적었는데 사회민주당에 대한 노동조합 지지가 꾸준했기 때문이고, 후에 노동자계층이 제3제국에서 나치당에 호의적이었는지 여부는 학자마다 학설이 강하게 충돌하는 부분이다.

만화나 패러디에서 악행을 강조하려고 또는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나쁜 짓을 했겠냐며 무식한 이미지로 묘사했지만 이들은 결코 못 배우고 무식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국민 평균으로 보아도 나치 지도부 출신은 평균적으로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해당하며, 죄다 깡패에 저학력자라는 건 전형적으로 잘못 알려진 지식으로 별 근거가 없다.

4.2. 정치적 성향

이처럼 초기 나치 당원들은 구제국서 기득권층이긴 했지만 프로이센에 밀려 주류는 아니었던 바이에른 지역 출신이 많았고 정치적 욕구가 좌절 되었던 신흥계층 출신이 주도했다. 바이에른 지역에서 유행한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나치당 당명인 '국가(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서 볼 수 있듯이 좌익 이론과 급진 반체제 사상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전통주의적 가치관을 지키고자 했음에도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 급진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는 당대 보수주의자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말 그대로 영향을 받은것이지 결국 기본 축은 당대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탈민족주의,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에 대한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고 독일 민족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였기 때문에 영미 극우파나 자유지상주의자 아닌 한 주류 학계에서는 명백한 극우 정당으로 본다.

또한 현재의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기준으로 20세기 초중반 독일을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가 있는 게 이 당시 독일의 민족주의 우파 진영에서도 반자본주의 성향이 높았다는 것이다. "천박한 부르주아들은 돈만 되면 나라건 민족이건 다 팔아먹는다"는 디스는 일반적인 것이고, 고트프리트 페더 처럼 은행 국유화, 이자율 폐지 주장[40]부터 1차세계대전부당 이득자 벼락부자들은 유대인과 같이 목을 매달아야 된다는 게 히틀러의 나치당 초기 연설 내용 주요 레파토리였다. 이런 성향은 나치당 좌파로 분류되는 괴벨스,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이어지며 슈트라서는 숙청 되지만 괴벨스는 승승장구하면서도 사회주의 성향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 나치당 좌파의 주장은 나치즘 양대축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우위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나치당 내부에서 주류 우파와 함께 노선 차이를 빚었다. 괴링 등의 나치 우파는 노동자를 먼저 민족주의자로 만들어야 한다 였지만 슈트라서 형제와 괴벨스 등의 나치 좌파들은 먼저 사회주의를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을 볼셰비즘[41]에 빠지지 말라고 설득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나치의 이론에 의하면 나치즘에서 이상인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조하며 계급 투쟁을 배격하지만 사회 변혁을 이끌 주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이념상 중요시 했다. 자본가는 국가사회주의에서 민족의 이익 범위 안에서만 사유재산 추구가 인정된다고 보았고, 농민들은 나치이론에 빈농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흉년 등의 재해시 정부가 직접 농산물을 구입하거나 인력을 보내 지원하는 등 사상적인 것보다는 결과적 이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노선으로 히틀러의 나치당은 초창기에 농민들의 콘크리트식 지지를 받아왔었다.

그러다가 나치가 성장하고 특히 집권 후 사회주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고 독일노동전선으로 국가사회주의 사상 획일화 조치로 볼셰비즘으로 의심된다는 노동조합을 박살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휴가와 여가를 누리게 만드는 목적인 '기쁨의 힘'이나 '국민차 계획(폭스바겐)'처럼 노동 계층에 부합한 정책도 있었고 무엇보다 임금을 다소 깎거나 여성들을 노동 현장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식으로 실업자 수를 줄이는 꼼수와 노동 계층의 지지를 얻기위해서 기업인들에게 고용 보장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 후에 1935년부터 경제 공황에서 회복으로 실질임금이 오르고 독일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로 접어들면서 노동 계층의 정치적 압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나치당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의 접접은 반유대주의 인종론으로 "공산주의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는 국제 유대자본"으로 통하는데 지금에서야 상반된 진영이 같이 유대인으로 엮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42] 당시 독일에선 나치뿐 아니라 교육받은 계층까지도 독일 민족의 것이 아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독일인을 약하게 만들어 민족성을 파괴하고 망하게 만들려는 국제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떡밥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는 금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장악될 뿐이고[43] 좌파 계열이 주장하는 계급 투쟁과 각국의 노동자 연대는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들의 야심대로 민족 고유의 특성을 박멸하여 세계 정부를 만드려는 음모론으로 해석한다. 여기에는 19세기 이전 유럽에서 유대인을 천민취급 하던 역사와 종교적 인종적 편견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배후중상설도 한몫 한다.

나치당이 극우 정당인데도 당명에 사회주의, 노동자가 들어간 것과 관련하여 계속 작붕이 생기는데, 나치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지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의 판단으로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사회주의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 유대인식 사회주의로 역시 유대인 음모론으로 연결된다.[44] 나치와 히틀러 기준에서 사회주의에서 국제적 요소란 마르크스식 계급 투쟁으로 유대인식(?)인 계급 투쟁과 배격해야 한다는 식으로 흐르게 되는데 따라서 독일 민족 고유의 국가사회주의란 인종적으로 결합해서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는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를 추구하는것이다. 현재 우리식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북쪽 동네와 비슷한 면도 있다. 다만 나치가 표방하는 사회주의는 주류학계에서 '사회주의'[45]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우파사회주의(Right-wing socialism)[46]라고 칭하기도 한다. 나치당의 사회주의는 본래 의미의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는 셈.[47] 일단 주류학계에서나 일반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나치즘(=민족사회주의)이 '사회주의'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치당의 전신을 타고 올라가면 독일 제국 시절에 존재한 극우정당 제국당(Deutsche Vaterlandspartei)이 존재하는데, 이 당 노선 자체가 군주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정당이였고 좌파나 사회주의와는 당연히 거리가 억만년은 떨어져 있는 정당이였다(...). 이를 보아하듯 나치당이 민족사회주의를 내세운 것은 기존 형태의 방임주의적 자본주의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잃었으며 기존 극우가 내세우는 군주주의나 귀족주의로는 다수대중들의 표심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다수대중과 노동자 표를 얻기 위한 의도적인 포퓰리즘적 행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48]

나치당과 히틀러는 의외로 같은 독일민족, 더 나아가 북방계 유럽민족들끼리는 평등해야 한다는 사고관을 갖고 있어서[49]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능력중시의 인재선발을 강조했고 전쟁중에 융커가 주류인 프로이센 장교단을 불신한 건 널리 알려져있다. 전통귀족이 장악한 육군보다는 공군과 해군에서 전쟁영웅 만들기에 열올렸고 육군에서는 평민 출신장군의 대표적인 예시인 롬멜을 띄우는데 이런 의도도 작용했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이후 "우리가 좌파 투쟁에 열중하다 보니 우파 투쟁을 잊었군!!" 하며 히틀러가 길길이 뛰는 일화도 있다.

서구 민주주의와 의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반감이 상당했는데 독일제국이 패망하자 연합국에서 군부와 카이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민주정부와만 협상한다고 선언해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연합국에서 강요한 것으로 보았고 나치당에서는 토론이나 다수결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것 같은 중2병에 빠졌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민주제 체제라는 것은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영미나 프랑스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기 위해 자본가에 손을 벌려야 하고 또한 공약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잘 보여만 하는 구조상 그것은 금권정치와 연결이 되며 유권자들은 그때그때 이익에만 충실하지 시대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여기까진 그럭저럭 맞는데 결국엔 독일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전통적인 독일인의 미덕인 명예심과 충성심, 인내와 자기희생, 끝없는 의지와 노력주의로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에게 위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급과 당파를 떠나서 민족 공동체를 위해 히틀러 중심의 지도자 원리로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솔직히 여기서 히틀러 빼고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같은 걸 넣으면 좋아죽을 사람들이 많다[50]

따라서 나치당내 이념이 현대 한국기준으로 좌나 우냐 따지는 건 무리가 있다. 어른의 사정으로 늦춰지긴 했지만 애초에 귀족출신 상류층, 기득층 보수교회세력, 프로이센 상류층 출신 군부, 부르주아들은 나치 기준으로는 잘났다고 고개가 뻣뻣하거나 비리부패에 걸리는 순간 한번에 박살내야 할 대상이란 것이다.

프로이센 군부는 뒤늦게 전쟁 후기에야 완전히 손을 봤지만 반나치적이거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가톨릭 세력들은 정교협약을 무시하고 나치당에게 탄압을 받았으나 친나치 성향의 가톨릭 세력들은 친위대 고위급 인사들이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라서[51]]] 보호와 혜택을 받았었다. 이와 똑같이 개신교와 나치당의 관계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반나치 성향 고백교회의 등장으로 인해서 탄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나치당이 성공을 거두면서 정치적 힘이 생겨나고 높으신 분들과도 연결이 많이 되는데 집권 전까지 기업인 중에서 나치빠 성향은 프리츠 티센[52]이 거의 유일하고, 괴링과 햘마르 샤흐트가 히틀러와 재벌들 사이를 연결해주었지만 일회성으로 받는 돈들은 대부분 괴링과 히틀러의 호주머니로 들어 갔기 때문에 나치당 재정에 별 도움은 안되었다고 한다.

부르주아들은 제3제국에서는 유대인 기업가들 빼고 딱히 큰 탄압을 받지는 않았는데 주 목적은 독일의 빠른 재무장 때문이었고 결과적으로 재무장과 전쟁으로 군수기업들이 큰 혜택을 보았다. 애초에 부르주아들의 도움이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쟁에서 물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손을 잡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재 업종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출판업과 유통업은 큰 타격을 받았고 영화 산업은 헐리우드에 이어서 2위로 바이마르 시대에 독일 영화산업은 유럽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작품 수가 많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나치정권하에서 영화사는 3개만 남기고 그마저도 강제로 국유화 된다. 그리고 혜택을 크게 받았던 군수기업들도 대가를 치루며 전후에 해체되거나 업종을 변경한다.

나치당에 초기에 몸을 담았고 1925년 나치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차세계대전시 참모차장과 군수총감을 겸하며 힌덴부르크와 공동결정권으로 사실상 독재자 역할을 했었다. 루덴도르프는 전시에 군수기업의 국영화를 추진했는데 이유란 게 없는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총력전 체제로 이행해야 하는데 기업인에게 가는 이윤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군수기업의 이윤을 몰수해서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 몫을 늘리려는 것이 국가사회주의식 경제관이었다. 2차대전 후반에도 이러한 총력전 체제가 알베르트 슈페어 괴벨스 주도하에 추진되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어서 추진 실적은 거의 없긴했다.

4.2.1. 제3의 위치

첨언을 하자면, 파시즘은 1920년대 당시 "서드 포지션"(Third Position. 제3의 위치)#이라 불리며 좌파, 우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대안으로 평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계급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고 반민주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으므로 좌파의 입장에 반드시 대입되지는 않지만[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복지와 반자본주의적 입장이 강했고, 우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전통적인 봉건적 왕당파와는 궤를 달리하는 인민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희생과 신비주의에 대한 숭고미를 추구했다. 제3의 길과 같은 포지션은 대립하는 두 이념, 정치세력 사이에서 언제나 나오게 되어 있으니깐. 근데 길과 위치 한단어 차이인데 양상은 꽤나 다르다.

나치즘은 서드 포지션에 영향받은 파시즘의 방계 정도로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서드 포지션이라는 것이 다른 사상에 비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도 않고, 의미있는 정치 세력이 드물기 때문에 좀 헐렁하게 대충 어림잡아 서드 포지션이라고 뭉뚱그레 호칭되는 면이 있다.[54] 사실 나치당내 좌파들은 실제로 좌파주의적 정책들을 독일 게르만족 사이에서 실현시키려 했는데, 히틀러가 정치적 안정과 재무장을 위해서 부르주아들과 타협하고 정권을 잡자 배불러진 나치당 간부들은 좌파 성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회혁명을 부르짓던 돌격대가 좌파의 중심은 아니고 1933년 정권 잡기 직전 숙청 된 그레고어 슈트라서(동생 오토 슈트라서)가 이탈하면서 당내 좌파 세력이 약화 된 탓도 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히틀러 몰래 자유주의 우파정당과 연립정권을 시도할 정도로 오히려 나치 주류보다 유연했다.

4.3. 도덕적 해이

집권 이후 나치당은 초법적인 존재가 되어 갔고 견제세력도 없었던 데다 구성인원 대부분이 기득권화되어가다 보니 내부 부정부패가 심했다.[55] 나치당 내부에서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기 위한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권력을 이용해 재벌들을 억압하여 뇌물을 받아먹는 등의 부정부패가 비일비재했다.[56]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나치의 정치수뇌부들은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해버리고 국민들에게는 대피령을 내리기는 커녕 적들이 눈 앞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57] 오히려 자기가 살기위해서 전쟁에서 지는 와중에도 물자를 횡령하는 쓰레기들 천지였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독일인들을 붙잡아 최전선에 절망적인 저항을 하도록 보내 버렸지만 각 지역의 나치들은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자살해 버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일선에서 피 흘리고 싸우는 장병들과 시민들에게 떠넘기는 뻔뻔함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동맹국이었던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58]

5. 전후 인식

일단 세계 전체로 봤을 때 나치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는 당연히 "극히" 적다. 사실 나치당이 몰락한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양분하며 서로 으르렁거리며 냉전에 들어간 미국과 소련이 2차대전 당시 똑같이 나치에게 데이고, 둘이 함께 싸우며 나치를 때려잡았다는 점을 볼 때 세상에서 나치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가 많은 게 이상하지 않을까?

덕분에 이들은 웃자고 하는 게 아닌 이상 스와스티카나, 인터넷에서 흔히 나치에 대해 보이는 동경심 자체에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낸다. 나치의 군복이 멋지다거나 아돌프 히틀러 사진이 간지난다 같은 발언만 해도 사회적 생매장을 시키는 분위기니 주의하자.[59] 영국 왕자가 SS 복장을 하고 핼러윈 파티에 나타났을 때 죽이느니 살리느니 소리가 나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을 휩쓸던 독일에 대한 공포와 괴벨스의 선동술이 워낙 약발을 잘 받아서 나치의 독재 체제가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빠른 재건과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부정되는 추세다. 당장 전후 재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경제 정책만 봐도 군수 산업 우선으로 체제가 바뀌면서 경제 혼란이 오기 시작했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조직 간 손발이 안 맞아 전쟁하는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의 비효율적인 운영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인재들이 이를 바로잡는데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나치당 내부의 부패는 매우 심각해 아첨꾼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괴링을 비롯한 고위직들에게 비리는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당원들은 선동활동이나 내부의 적 색출이라는 명목의 탄압 활동은 잘 했어도 막상 적들이 쳐들어오면 자기의 일신만 챙겨서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독일이 전쟁터가 되는 와중에도 국정 운영도 모르는 주제에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있을 정도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폴란드 침공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망상도 원인이었지만 제3제국 체제 자체가 내부 문제가 워낙 심해서 일본과 같이 침략이 없었으면 유지되기 힘든 체제였다. 역시 같은 전체주의 국가끼리 통한다.

5.1. 영국, 프랑스, 미국 및 서유럽

프랑스는 나라가 점령당하고 수탈을 당하는 등, 나치라면 지금도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이면도 있긴 하다. 프랑스가 나치에 의해 점령당할 당시, 프랑스인들은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 골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를 비시로 옮긴 채 국토의 절반을 그냥 내줬다. 당시 상당수의 보수적인 프랑스인들은 나치의 반공주의와 코포라티즘을 어느 정도 역할모델로 삼았다.

물론 이것은 대체적인 정국의 흐름일 뿐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분투를 평가절하할 수도 없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저항 정도는 대전 내내 꾸준히 이어졌으며, 미국이 괜히 리버레이터 같은 권총까지 따로 만들어서 뿌려준 게 아니다. 그 권총이랍시고 나눠준 쇳덩어리의 경이로운 성능에 대해서는 잠시 눈감아주자. 유럽전선쪽에는 별로 뿌리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의 전통과 인종주의, 파시즘(과 약간의 네오나치즘)이 교묘하게 짬뽕된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상당한 득표(대략 유권자의 10-15%가량이 고정 지지층)를 받는 정당으로 존재한다. 다만 결선투표제의 영향으로 실제영향력은 적은 편.[60] 국내에서 개고기 논쟁으로 유명한 브리지트 바르도가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자서전격인 만화인 《발작》을 보면 간질 환자인 자기 형이 아주 열렬한 나치 추종자였다고 나오는 등 프랑스에도 미친놈들은 없잖아 존재하는 모양이다.

영국은 당시 점령당하지않고 소련과 함께 딱 둘뿐인 나치에 맞서 싸웠던 나라였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61] 나치와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있던 식민지 대국 대영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전쟁이 끝난후 영국은 작은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 시대를 위대한 시대라 부르며[62] 나치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그 어떤 역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은 전세계에서 네오 나치 단체들이 가장 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특유의 보수성과 인종주의 때문에 1920, 30년대부터 나치즘 단체가 있었고, 미국-독일 분트는 2차대전 이전까지 꽤 큰 성장을 보였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버로우. 전쟁 이후에 미국 나치당이 1959년 결성되었고, 그 외에도 미국 국가사회주의자당이나 국가사회주의 운동 등등 별의별 네오나치 단체들이 존재한다.

또한 수정헌법 1조의 위력덕분인지 잘 찾아보면 주로 언더그라운드 넷에서 나치 드립치는 또라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4chan의 /b/판 상주자같은 4chan중에서도 상또라이 취급받는 이들이라든가, Encyclopedia Dramatica의 편집자들[63]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인터넷상의 나치드립이라 할지라도 상당수는 넷 언더그라운드에서 돌아다니는 블랙 코미디에 불과하며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천조국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나치 드립을 치면 눈총받기는 마찬가지.

사실 미국은 나치드립이라기보다 "강력한 미국, 세계경찰 미국"을 당연시하거나 동경, 추구하는 것을 지지하는 구성원이 많다보니 나치드립이라기보다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외에도 서유럽에서 나치 치하에 있던 어지간한 국가는 나치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특히 네덜란드 같은 경우는 중립국 특성까지 무시당한 채로 나라 자체가 점령당했고 거기서도 유태인이 많이 끌려나가 죽었기 때문에(《안네의 일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치에 대한 분노는 연합 참전국 못지않게 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네덜란드의 아른헴이 연합군에게 해방된 후 그 마을에 살던 나치부역자들은 자경단에 의해 총살당하고 독일군과 눈이 맞은 여인들은 삭발당하고, 머리에 하켄크로이츠 낙서가 그려지고 마을 바깥으로 쫒겨나는 묘사가 있다. 이건 그나마 양반이고 그리스의 섬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에서는 독일군과 썸싱만 있었을 뿐인 여성을 목매달아버리기도(...)[64]

또한 유럽에서 2차대전 관련 프라모델이나 게임을 들여올 때 하켄크로이츠는 삭제해야 유통할 수 있다. 이 경우 하켄크로이츠는 대부분 철십자 문양이나 독수리 문양으로 교체된다. 설령 유럽인이 주인공이고 나치를 때려잡는 내용일지라도. 프라모델의 경우 데칼을 반으로 잘라서 LΓ 모양 2개로 인쇄해 두고 조립자가 알아서 합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5.2. 오스트리아

히틀러가 탄생한 나라. 정작 히틀러 본인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대변되는 모국의 봉건적, 다문화주의적, 다민족적 분위기를 혐오한 나머지[65] 독일로 도피해서 독일의 국가원수가 되고 고향에게 돌려준 것은 독일땅으로 강제합병을 한 것이었고, 독일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대악당 하나 잘못 배출해서 독일에게 질질 끌려다녔으니 여기까지는 독일에 상당히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 발트 3국과 함께 나치 독일에 강제적으로 점령됨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학살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가이다. 그래서 전후 연합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동쪽은 소련 치하, 서쪽은 영국, 프랑스, 미국 치하에 놓이게 되어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분단국가가 될뻔했다.

그러나 일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게르만 민족이고, 히틀러가 탄생한 곳이라 그런지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반성이 철처하게 이뤄졌던 독일과는 달리 1990년대 들면서 극우 정당(자유당)이 상당한 세를 얻고[66] 나치에 호의적인 정치인들이 여럿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대통령까지 한 쿠르트 발트하임과 전 케른텐 주지사였던 외르크 하이더가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 히틀러 부모가 묻힌 묘소는 네오 나치성지순례를 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가 뒤늦게 묘소를 철거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영화배우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도 부친의 나치군 복무 전력으로 미국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5.3. 러시아와 동유럽/발칸반도 국가들

대조국전쟁 시기에 유태인 만이 아니라 수많은 소련인민들은 게르만족의 생활권(레벤스라움) 확보라는 명목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소련은 애초부터 베어마흐트에 비해 질적으로 열악했었던 것에 더하여 대숙청 등으로 군 지휘체계까지 막장이였던 상황이라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대조국전쟁 당시의 소련 측 사망자2900만 명(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다)으로 잡고 있는데, 이 중 900만 명이 군인, 2000만 명이 민간인들이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전체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숫자다.

그러나 소련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군을 쳐부수며 전쟁에서 승리했지만[67], 이미 모스크바에서 베를린 사이에 남아 있던 것은 오직 잿더미뿐이었으며 나치의 학살과 침공으로 생겨난 인구적 타격은 비율로나 절대수로나 가장 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벨라루스[68]의 경우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뼈로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될 정도이며, 레닌그라드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키예프 전투를 겪은 소련 서부 지역의 도시들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나치와의 전쟁을 대조국 전쟁이라 부르며 승전한 날을 가장 큰 행사로 치룬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러시아 등지에서는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외국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네오 나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자기네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들은 조국을 나치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웠는데 그야말로 누워서 침뱉기하는 꼴.

당연하지만 폴란드와 체코, 그리스에서는 나치는 그야말로 악마 중의 악마, 악의 축이다. 체코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뮌헨 협정으로 수테텐란트를 뜯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나치 독일에게 합병당하기도 했으며, 그리스 역시 제2차 세계 대전때 나치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게 국토가 점령당한 적도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지 70여년이 지난 유로존 재정위기 당시 그리스에게 긴축정책을 권유하던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나치독일군으로 묘사한 만평들을 그리기도 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기인된 걸 감안하면 당연히 나치에게 이를 갈만도 하다.특히 폴란드의 경우 1939년, 그러니까 전쟁 직전 폴란드의 인구는 3500만 명이었다. 이 중 1/6인 600만 명이 1945년까지 나치가 폴란드를 통치하는 동안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참고로 2차 대전 참전국 중 인구 대비 희생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폴란드였다. 희생자 600만명 중 290만 명은 유대인, 277만 명은 폴란드인[69]이었다.[70] 또한 법률가의 절반 이상, 의사 40%, 대학교수, 가톨릭 성직자 1/3 이상이 학살당했다.[71] 물적 피해도 심각하여 전체 국가 재산의 40%를 손실했으며, 바르샤바, 그단스크, 그디니아, 포즈난 등 주요 도시들이 폐허화되었다. 게다가 전후에도 과거 완전한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소련의 위성국으로 휘둘려야 했던 역사가 있기에 폴란드인들에게 나치는 엄청난 역사적 시련을 던져준, 악마 그 자체다.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편에 섰던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도 나치에 대한 인식은 안 좋긴 마찬가지. 이 쪽도 나치의 반강제적인 추축국 합류로 인해서 전후에도 소련에 의해 강제적으로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휘둘리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반강제적으로 히틀러에 의해 추축국에 참전해야 했던 불가리아와 다르게[72]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나치의 압력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도 전쟁에 참전하고 나치와는 별도로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도 독소전 등지에서 전쟁범죄도 자행했기에 애매하다.[73] 심지어 이들 3개국은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추축국의 일원이었음에도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 아닌 나치에 의한 피해국이라고 외치며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물론 나치즘과 반유대주의를 추종하는 현지의 극우파들과 극우 정당도[74] 있지만 이들 3국의 국민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불가리아 등 발칸반도 국가로 여행 갔던 한 영국인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에 가서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을 함부로 했다가 그 곳의 현지인 남성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75]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다만 발트 3국 등지에서는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치에 부역한 이들도 많았고 이들은 지금까지 친 나치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주변국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발트3국은 크로아티아와 함께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학살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몇 안되는 지역이다. 당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게 동조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나치가 오기도 전에 앞장서서 미리 유태인들을 몰아놓고 개패듯 잔혹하게 살해했던 역사까지도 마치 독립운동으로 포장하려는 일각의 주장은 도를 넘은 듯 하다. 심지어 라트비아에서는 슈츠슈타펠 자원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련이 탄압하던 몇몇 소수민족 역시 나치를 자신을 해방하려는 자들로 보고 우호적으로 본 사례도 있다.

크로아티아[76] 같은 경우 나치당에 부역한 정교유착의 결과물인 민병대로 우스타샤가 있었는데, 이들이 나치당에게 아부하면서 (현지 주둔 독일국방군이 경악할 정도로) 세르비아계와 유대계, 집시들을 학살하고[77] 현대 크로아티아의 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 우스타샤를 애국자로 취급하거나 이들을 지원한 나치를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했던 세르비아에서는 나치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편. 그러나 정작 이 쪽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계로 이루어진 유고내 저항 조직인 체트니치가 나치에 대항하는 창설 초기의 이념은 갖다 버리고 나치 독일 등 추축국에 빌붙어서 전쟁범죄를 벌이기도 하고,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벌어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나치독일이나 크로아티아를 욕 못할 정도로 보스니아계 주민들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 수준의 대량학살과 보복을 저질렀으니 어찌보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를 제외한 다른 구유고권 국가들인 몬테네그로북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의 경우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등 추축국에게 점령당한 역사 때문인지 나치를 긍정적으로도 보지 않는다.

동유럽의 빈국인 알바니아 또한 제2차 세계대전때 추축국과 싸운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나치에 대한 반감이 있다. 아예 알바니아 공산정권의 초대 수반인 엔베르 호자 전 서기장이 빨치산 활동을 하며 독일군과 이탈리아군과도 싸웠을 정도. 다만 현재의 알바니아는 목구멍이 포도청일 정도로 동유럽에서 굉장히 가난한 나라인지라 나치 시절 독일에 대한 반감이 있어도 현재 독일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국이라 현재 집권층의 정치인들조차 대놓고 나치에 대한 증오감이나 폴란드나 체코처럼 독일에 대한 과거사 사죄 요구를 드러내지 못 하고 있다.

5.4. 북유럽

서유럽과 동유럽에 비하면 반감이 덜하겠지만 여기서도 평가가 영 좋지 않다. 나치가 이쪽 민족들을 롤모델로 찬양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대단히 착각한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철광석을 팔아 뒷거래했다는 것이 기정사실인 스웨덴조차 유대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숨겨주고 나치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78] 물론 SSS, 뉘스벤스카 협회처럼 적극적으로 친나치 성향을 가진 단체들도 활개치긴 했으나 생각보다 영향력은 크지 않았으며 당연히 2차대전 이후에는 모두 금지되었다.

그리고 겨울전쟁, 계속전쟁 과정에서 나치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같은 사례도 실상은 소련이 더 미우니까 이이제이적인 접근으로 다가간 것이었고 나중에 라플란드 전쟁으로 뒤통수를 쳤다.[79] 덴마크[80], 아이슬란드[81], 노르웨이에서도 다른 유럽 국가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 대세인 편이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아예 대놓고 나치에게 철저히 농락, 유린당한 기억이 있어 현재까지도 치를 떤다. 여자들의 경우 독일인과 노르웨이인의 혼혈을 낳을 것을 강요당했고 남자들 역시 반 강제로 독일군이나 친위대에 징집되어 종전 후에는 위의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식의 후폭풍을 겪어야 했다.[82] 괜히 안데르스 브레이빅이나 버줌처럼 대놓고 네오나치, 극우 성향을 보이는 범죄자들에 대해 법정 최고형[83]을 선고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로는 모두 대세가 그 유명한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일부 철없는 네오나치들이나 흑화한 신이교주의자들이 아닌 이상 자기들 칭찬해 줬다고 태연하게 전체주의, 군국주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한 나치를 대놓고 찬양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봐도 좋다.

5.5. 아시아

그들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거나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식민제국 연합국들이 자기 식민지에서 학살, 착취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킨 것에 시달려야 했던 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나치에 대한 반감이 덜한데, 이 때문에 나치에 대한 찬양, 미화, 희화 등등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성행하고 있다.

특히 나치의 만행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동양에서는 금기가 덜해서 그런지 다루는 게 자유로워 이미지가 좋게 나오기도 하고 희화화와 미화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반제국주의쪽 성격에 동감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이런 일련의 나찌 미화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세계의 정세를 쥐고 있는 것은 나치를 혐오하는 유럽과 북미권 국가들이므로,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대놓고 나치에 대한 평가나 논의는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일제가 완전히 청산된 것이 아닌 일본에서는 주로 수꼴들이 미화 및 추켜세우기를 하거나 자기들 대신 전쟁범죄를 뒤집어씌워 욕받이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일본 극우물들을 보면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모조리 나치에게 떠넘기는 묘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행히 모든 일본인이 저런 노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일본의 어느 글로벌 토크쇼로 추정되는 TV 프로그램에서 나치 코스프레를 한 밀덕들이 나왔는데, 그것도 서양인들이 모인 프로그램이라 등장하자마자 현장의 모든 서양인들에게 아주 까이고 까였고, 유럽인들만 깐 게 아니라 한국인, 중국인 등 참석한 외국인 전체에게 모두 까였다. 나치 코스프레한 밀덕들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치 군복이 짱 멋있음", "그냥 좋아하는 것일 뿐임" 하며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미친 듯이 어그로를 끌었고, 여기에 어느 프랑스인 한 명이 빡쳐서 "나치스 복장 하고 있는 네놈 뭐야, 쪼개지 마라"라든가 "너 이따 밖에서 이야기 좀 하자."라든가, 그 외에도 다른 외국인들에게 미친 듯이 폭풍 질타를 받았다.

동영상 보기
동영상과 번역본을 보면 알겠지만 나치 밀덕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행자들도 방송 이미지 때문인지 중립적인 말만 하고 있지만 그들도 사실 까는 듯한 모습이였다. 특히 미국인 관객이 "니들 그 꼬라지 할로윈에서만 해라. 당신들이 하는 짓은 지금도 전쟁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거라고!"라 외치는 것, 마지막에 밀덕들이 퇴장할 때 그 중 한 명이 대놓고 당당하게 나치식 경례까지 하자 분노가 폭발해서 현피 뜨려고 자리 박차고 뛰어나가다 제지당하는 장면이 포인트.[84] 죽빵 갈기려다 제지당한 프랑스인이 독일인들 보고 "니들이 제일 잘 알잖아! 왜 화를 안 내? 니들 이상해!" 하고 화풀이하자 "어차피 총으로 죽일 거니까 심벌은 상관없음" [85]라고 하는데 반박하는 것으로 보아선 독일인들도 크게 참은 듯하다. 외국인들 모두가 자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담으로 진행자 중 한명이 혐한 꼰대 기타노 다케시다.

2013년 7월 29일. 아소 다로는 한 강연회에서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어느 틈엔가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렸다. 그 수법을 배워 보면 어떨까" 라고 했다.

서구권에 비해서는 훨씬 작지만 아시아 국가들에도 네오 나치가 살짝 존재한다. 몽골, 이란,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은 애초부터 제3제국이 일본제국의 동맹국이었던만큼 나치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잘 나오지 않았고, 또한 독일이 조선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던지라 일제 시대 당시의 조선인들은 나치에 대한 악감정이 별로 없었다.[86] 일제 시대의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양반도 가끔 가다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은 어쨌거나 일본의 우방국이었고, 한반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은 독일인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까지는 독일인들에게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는 것. 문제는 이 분들이 2차대전 이후 어쩌다 독일인들이 한국에 들렀을 때 "아, 독일? 하일 히틀러?" 하고 인사해서 당혹스런 상황이 종종 연출되었다는 것.

간혹가다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저서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고 어느정도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다고 한다. 책 자체를 구하기 힘든 시대였고 원전은 더더욱 하늘에 별 따기로 구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나의 투쟁이나 파시즘의 원칙(The Doctrine of Fascism) 같은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당시 좌파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했고, 우파 독립운동가들은 소설로 된 역사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주로 접하거나 중국식 삼민주의에 깊이 공감했다. 간혹가다 일본식 근대주의자들에게 공감하거나 아시아주의에 공감하는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성한 것이 아니듯,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사례를 간혹 언급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자체에 경도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범석 장군이나 안호상 박사처럼 나치즘 추종자나 파시즘 추종자들이 있기는 한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사찰이나 점집에서 상징을 보고 서양인들이 순간 흠칫할 수도 있다.(사실 상식이 어느 정도 풍부하면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걸 알고 있을 리는 없으니) 사실 좌만자와 우만자는 동형이자다. 卍자에 비해 하켄크로이츠는 45도 정도 기울어 있다곤 하지만 개요 부분 첫번째 사진만 해도 안 기울어진 하켄크로이츠를 쓰고있지 않은가?

하지만 가끔 가다 중동이나 인도에 한정해서는 오히려 나치는 미국과 영국, 유대인들에 맞선 정의의 편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없잖아 있는 모양이다! 단, 이란의 경우는 중립을 표방했음에도 연합군에게 강제 점령 당한 경험이 있어서 이란 한정으로 나치 찬양 한다고 뭐라 하긴 그렇다. 이란 입장에선 연합군이나 추축국이나 그 놈이 그 놈

중국은 사실 중일전쟁중화민국 정부와 나치 독일과 상호교류를 한 적이 있고 나치 때문에 피해를 받은 게 거의 없다. 실제로 히틀러가 "일본 제국과의 협력은 계속하되 중국 국민당에 지원은 계속하라"고 지시했었고 장제스도 양자 웨이구오를 독일군에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도 딱히 나치와 엮인 적이 없는지라 중국에서도 관심이 없고 네오나치도 잘 보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전신인 소련공산주의가 있잖아?[87] 실제로 욘 라베나치 독일중국과 우호하다는 것을 알았고, 것보다 난징대학살때 많은 중국인을 구해낸 공적이 있다. 그래도 오늘날 중국인들이 나치 독일 자체에 대해서는 똑같이 부정적인 입장이다.[88]

인도의 경우에는 영국의 악랄한 식민통치와 영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면이 있는 1943년 벵갈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어 영국하면 치를 떨고 있고 찬드라 보스 등은 일본이나 나치를 비롯한 추축국과 손을 잡아 인도를 독립시키려 한 전적 등으로 피부로 와닿는 압제자인 영국보다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나치에 은근히 호의를 품기도 하며 인도에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나오고 '총통의 카페'라는 프랜차이즈가 존재할 정도다.

이건 옆나라 파키스탄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독일인은 파키스탄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독일인인 자신을 보고 갑자기 히틀러와 나치를 열렬히 찬양하면서 유대인 욕을 하길래 경악한 일도 있다. 그래서 기사보고 히틀러 그게 얼마나 미친 학살자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쇼? 라고 화를 내자 당신이나 나나 같은 아리아 인인데 왜 그러느냐? 라고 당황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틀러가 같은 아리아 인이라고 인도인을 잘 대해줬을 지는 의문이다. 히틀러가 "만약 자신들이 인도를 통치했다면 인도인들은 영국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미확인 발언이다.) 191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전 세계의 무슬림들은 단결하여 연합군의 사탄들에 맞서 싸우라고 지하드를 선포하자 아프가니스탄과 펀자브 출신의 무슬림 인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독일군 포로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동료로 맞아들이려고 했는데 독일군 포로들은 적이지만 같은 백인인 영국이 너희보다 좋다고 생까버렸다(...). 존 키건의 1차 세계대전사에 나온 내용이다.

이란의 경우도 유대인하면 치를 떠는 특성상 '유대인을 쓸어주신 총통 각하'에 대해 호의를 품는 사람이 있으며 이란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유엔에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과 연합군의 음모라는 연설을 했다가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대사들이 일제히 격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적도 있다. 그러나 이란에서 국부대접을 받는 호메이니 또한 제3제국이나 히틀러의 학살 정책을 비판하였다.[89]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유대인하면 이를 가는 아랍권 지역에서도 "히틀러도 유대인들에게 저런 짓은 안했어! 히틀러가 저 개같은 유대인놈들을 죄다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면서 은근히 유대인에 맞서 싸운 투사 대우를 받기도 한다.

만약 나치가 인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그럴리야 없었겠지만 전쟁 당시 립서비스를 하긴 했어도 이들을 딱히 우대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다만 중동의 경우엔 다를지 모른다. 히틀러는 중동인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고 특히 이란의 경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나치의 잔당 중에는 아랍 국가로 넘어가 독재자들을 위한 정치경찰 창설에 도움을 주거나 그들이 증오하는 유태인들이 세운 국가인 이스라엘과 싸웠다.####

5.6. 남아메리카

여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라 나치에 대해서 별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거기에 이 지역은 군사독재가 극심했기에 똑같이 독재를 한 나치에게 반감을 가질 일이 별로 없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실제로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이곳을 주요 도피처로 삼았을 정도. 사실상 아르헨티나추축국 편이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에서도 이곳은 생각보다 피터지게 싸우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요즘은 추축국에 적대적인 중국, 러시아와의 경제 및 외교관계를 중요시하다 보니 나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성향은 많이 사라졌다.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당이 아니라 다른 악당과 동일한 수준의 악당으로 객관적으로 보려한다는 게 차이점. 다른 악당과 동일하게 대우하므로 하켄크로이츠같은 나치의 상징을 써도 제재받거나 지탄받는 일은 없다.

6. 기타

파일:독일1.jpg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독일전 당시, 일부 한국 관객이 "나치의 자손들아, 떠나라!"는 피켓을 든 적이 있다.. 독일인들이 나치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는 최악의 모욕이다.근데 그로부터 16년 뒤 진짜로 독일에게 모욕을 주긴 했다(...)

6.1. 제복과 집회, 다큐멘터리

나치의 멋들어진 제복과 장식, 그리고 웅장한 건물과 장식들, 거대한 집회와 그것을 널리 알릴 다큐멘터리.

마치 탐미주의 집단처럼 보일 정도로 나치당이 멋진 외양에 신경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열등감의 해소"였다. 세련된 문화를 가졌던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비하면 통일도 되지 못한 채 문화적 후진국 취급을 받았던 독일의 뿌리깊은 열등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겪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처절한 상황에서 열폭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적인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멋지고 웅장한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위압감을 통해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고 자신들의 추악한 행동을 미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6.1.1. 제복

나치당의 제복 디자이너는 휴고 보스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보스와 그의 공장은 단지 제복생산에 관여하였을 뿐이다. 나치당의 제복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검은 SS제복은 카를 디비치(Karl Diebitsch) 교수와 그래픽 디자이너 발터 헤크(Walter Heck)가 디자인 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당부분 과거 독일제국군의 전통적인 제복에 근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순수한 창작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그들은 이 위압적인 제복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는 한편 나름대로의 자긍심 고취에 성공한다.

나치의 제복은 과거나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멋진 디자인으로 호평 받고있는데 이러한 디자인 호평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혹은 어떨결에 생긴것이 아니라 철저한 히틀러의 노림수에 의해서 생긴것이다. 당시 히틀러는 제복을 만들라고 지시할때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디자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였고 그렇게해서 탄생한 멋진 나치 제복은 히틀러의 노림수대로 당시 수 많은 독일 젊은이들이 나치에 관한 환상을 품게 만들어 그들을 나치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즉 나치 제복의 멋진 디자인은 계획대로 만들어진것이기에 멋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것은 크게 잘못된게 아니다. 다만 수 많은 이들을 선동하고 죽게 만든 제복을 단순히 멋있다는 이유로 똑같이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것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멋진 디자인과는 별개로 나치 제복은 군복으로써의 효율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보면 알겠지만 몸에 쫙달라 붙기 때문에 뛰고 기고 구르는 전쟁터에서 입을 만한 의류는 아니다. 괜히 군복들이 크고 헐렁하게 디자인되어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변함없는 사실은
1. 제복을 공급했었던 휴고 보스는 나치추종자였다.
2. 1938년 부터는 군복생산과 더불어 나치 친위대 제복까지 만들었다.
3. 1940년 부터 열악한 환경 시설속으로 전쟁포로를 강제 노역 시켰다.

결국 2011년 9월 회사에서(당시 강제노역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공식 사과문 발표

6.1.2. 건축

당시 유럽에서 대두되던 실용적이면서 현대적인 모더니즘 건축을 거부하고, 웅장하고 거대한 고전주의에 사로잡혀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해 참고.

6.1.3. 영상

1934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의지의 승리는 정치 영화의 시작이자 다큐멘터리 촬영과 연출의 수작으로 인정받는 영화이다. 그 제작의도는 나치당과 히틀러의 거대하고 웅장한 전당대회와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통해 암울한 상태의 독일 국민들과 세계에게 강력한 제3제국이 등장한 것을 선언하는 불순한 것이었지만 촬영과 영상만큼은 상당히 훌륭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훌륭한 영상을 통해 나치는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6.2. 동물 사랑

사람은 수백만을 학살해댄 나치는 이상하게 동물애호가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런 동물애호가적인 모습은 우생학과도 연계되어 있었지만.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인 데다가 사냥개로 동물 사냥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힘러도 동물에게 총질하는 것은 오락이 아닌 잔인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사람에게 총질을 했나 또한 이외에도 나치는 각종 동물보호법[90]을 만들었고 어기는 이들은 처벌했는데 어떤 곤충학자는 곤충에게 실험할 때 마취를 제대로 안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다. 물론 요제프 멩겔레는 이때 사람들을 산 채로 해부하고 있었고 유대인들, 소수 민족, 장애인, 동유럽 포로들 등등은 수용소에서 학살당하고 있었다.

또한 동물보호법은 위대한 아리안(…)에 어울리는 고고한 야수들(…)에게만 적용되며, 소모되는게 마땅한 가축들(=열등민족에게 어울리는 것들)은 소모되도 된다고 주장했다. 중세의 과격한 환경주의자[91]와 쌍벽을 이룰 과격한 동물애호가#

6.3. 창작물에서

나치와 관련된 수많은 음모론 떡밥들이 심심찮게 보이며, 각종 영화, 문학, 게임, 애니메이션 등에서 '악의 화신' 내지 '악마의 군대'처럼 묘사되어 등장하고, 이 경우 십중팔구 오컬트와 엮인다. 대표적인 예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등장한 나치의 특무기관 아넨엘베. 인디아나 존스에서는 성궤와 성배를 찾아내어 세계정복에 활용하려고 한다. 초고대문명설과 엮이는 경우도 흔하다. 울펜슈타인의 최신작에서는 평행세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또한 대체역사물에서는 흔히 있을법한 역발상 때문에 전쟁에 승리한다면, 최소한 유럽 강역, 최대로는 동/남아시아 정도를 제외한 유라시아[92] 및 아프리카, 북미까지 정복하는 경우도 있다. 심한경우는 전쟁에 승리한뒤 같은 추축군이었던 일본과 싸우는 경우도 있다. 완전 환타지 집단이다. 히틀러 최후의 망상이었던 라스트 바탈리온 드립도 음모론의 일부로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한다. 또 나치의 세계정복을 위한 비밀 연구 떡밥도 곧잘 등장한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전투조류의 묘사나, 가면라이더의 비밀결사 쇼커 등.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에 주의하자. 이것을 읽으면 나치의 오컬트적 성향이 철저히 주류 미디어에 의해 자극적으로 재생산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워낙에 악역 이미지도 강하고 실제 역사상에서 한 일도 끔찍한 터라 악역으로 굴려먹기 완벽하다. 게임상에선 좀비와 함께[93]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사람들이 별로 불만을 가지지않는 존재들[94]아니 더 못 죽여서 안달일지도 모른다 다만 요즘은 식상하다는 의식도 좀 있긴 있다. 식상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적을 바꾼 것이 레드 얼럿 시리즈. 히틀러를 날려버려서 나치는 안 생겼는데 소련이 커버렸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나치와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저런 크로스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냉전기 미국으로 가면 아예 나치와 소련을 대놓고 섞어놓은,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한 혼종이 악의 조직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유행하기도 했다(...).TV tropes의 '빨갱이 나치'(Commie Nazis) 항목 좀비와는 달리 엘리트 병사란 인상도 강해서 적당한 난이도도 제공하는 등 악역으로 만들기엔 더없이 좋은 존재들이다.
마블 코믹스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는 이들의 잔재 세력인 하이드라가 등장하는데, 굉장히 악랄한 놈들이다(...)

피해가 덜한 동양쪽에선 어쩌다가 가끔 개심한 나치 기믹의 선역이 나왔는데(루돌 폰 슈트로하임이나 브로켄 주니어) 이들 때문에 해당작품이 서구권에는 수입금지되기도 했다. 또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오리지널 적 세력인 쇼커는 이들의 잔재세력이란 설정이다.

독일에서는 나치(Nazi)라는 표기 자체가 금지되어있기때문에 NS라고 한다. 사실 같은 줄임말인데…. 네오나치들은 N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거침없는 모양.

IGN 비디오 게임 악역 투표에선 조직 그 자체로 6위에 올랐다. 등장한 게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모든 게임'.

6.4. 성적 판타지

파일:external/zepfanman.com/shewolf.jpg

여담이지만 '제복'과 '여자'라는 남성에게 있어서 영원한 떡밥이 결합한 나치 제복녀는 남자들의 성적망상에서 빠지지않는 가제트이다. 여간부의 원조. 악명높은 C급 에로물 《일자, 나치 친위대의 색녀(ILSA - She Wolf of the SS)》를 필두로 한 나치 일자[95] 시리즈나《살롱 키티》같은 준포르노물이 그 단적인 예다.

게임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에도 제복을 입은 여자병사들이 나온다.

이걸 가장 처음 한 나라는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였고, 얘네 아니었나? 그 다음이 적대국이었던 미국이다.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남자도 예외는 아니다. 게이들 중에서도 제복이나 가죽 페티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나치 제복에 성적 판타지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전술했듯이 나치 제복은 디자인 하나는 상위권이고, 제복 가죽 자켓이나 부츠 등도 디자인이 좋기 때문. 거기다 밀덕이나 리인액트먼트를 위한 재현용 레플리카가 지금도 나오기 때문에 남자 것은 구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쪽은 나치를 배척하는 문화도 만만치 않기에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분위기다[96]. 이 때문인지 외국에서 종종 열리는 게이 가죽 및 제복 페티시 퍼레이드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복장이다. 비슷하게 입더라도 부착물을 다 떼고 일부를 다르게 디자인한다던가 하는 변형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7. 관련 인물

나치 독일/인물 참고

* 양심적이거나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인물들은 @표시.

8. 관련 문서

8.1. 사상

8.2. 조직

8.3. 상징

8.4. 사건

9. 작품

10. 기타


[1] 나치오날조치알리스티셰 도이체 아르바이터파르타이, 엔에스데아페[2] 동양에서 생각하는 혈통적 민족주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3] 슈테판 마르크스 저 ≪나치즘 열광 도취의 심리학≫ 역자 신종훈(현 경상대 교수) 역자 주[4] 이런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건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다.[5] 다만 민족주의는 그 특성상 반드시 국가주의와 결합하기(민족의 경계를 국가 주권의 한계로 설정하는 경향 때문에) 때문에 일반인들은 혼동하는 것[6] 민족의 민족 고유의 의미이나 독일어에만 있는 고유의 뜻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어렵다. 나치 집권 후 괴벨스가 Volk를 독일 민족에만 쓰는것으로 결정하고 다른 민족에는 사용을 금지했다.[7] 卍자와 하켄크로이츠는 불교에서 혼용된다.[8] 칼 세이건의 저서 《혜성》에 이 卍자 무늬의 상징성과 신성성에 대해 저술한 내용이 있다. 원래는 기호학적으로 신성한 상징이었으나 나치 독일이 선점/사용해버려서 신성이 나락으로 훼손되었고, 이후 금기시되었다는 내용이다. 인도에서 유래된 게르만 전통 표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卍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다. 빨간 바탕에 스바스티카를 넣는 건 히틀러가 직접 디자인했는데 卍를 뒤집어 45도 비틀어서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만들었다.[9] 당명에 사회주의 를 넣은 건 그레고어 슈트라서이다. 이안커쇼 著 히틀러 1-의지- 참조.[10] 바이에른 주는 남독일의 중심부로 프로이센이 주도한 통일 이후에도 독립적인 분위기가 넘쳐나서 재정과 치안 등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분위기는 바이에른뿐만이 아니었다. 뷔르템베르크 작센 주도 더 많은 자치권을 보장받았다.[11] 카프 폭동의 주동자인 볼프강 카프에 의해 창당된 정당.[12] 가입 당시 나치의 정당 자금이 히틀러 한 달 용돈급이어서 비웃었다는 소문도 있다. 알려졌다시피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백수에 가까운 그림쟁이였지만 세무서장이던 아버지의 유산과 연금까지 물려받은 나름 금수저 혹은 은수저 출신이라 돈은 못 벌어도 돈 팍팍 잘쓰고 다니던 인간이다. 물론 너무 써대다가 잠깐잠깐 경제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하지만... 오죽하면 당일 일기에 "당 기금이라는 게 용돈 수준인 놈들이 황송하게도 날 받아주시겠단다"라고 비웃고 있다[13] 히틀러는 길거리 그림쟁이 시절에 부랑자나 노숙자들 일부와 친해져 심심풀이로 연설놀이을 자주 해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당원 수 많아보이게 하려고 당원 번호를 501부터 시작하게 해놓았다. 따라서 히틀러는 55번째로 가입한 당원.[15] 그것도 두개나 받았다. 2급과 1급. 받은 사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지만 어쨌건 객관적으로 굉장히 받기 어려운 훈장인 것은 사실이다.[16] 히틀러의 연설 기술은 대단한 수준으로 지금의 선전, 선동의 기본을 확립했다. 물론 이 시절에 이미 완성된 건 아니고 10여년 이상 선동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엄청난 연구와 경험을 통해 완성해낸 것이다. 그래도 상술된 대로 놀고 먹던 시절에도 연설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시작했던 상황이라 기본 능력은 있었다. 또한 발전한 것도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괴벨스 등의 지원이 있긴 했겠지만.[17] 당시 사민당 정권은 군부에 무장 봉기 진압을 "부탁"할 정도로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이것은 사민당, 중앙당 등 민간인 정치 세력이 1차대전을 주도한 군부를 밀어내고 집권한 것이 아니라 1차대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기 싫은 군부가 자발적으로 퇴장한 뒤에 등장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18] 베르사유 조약으로 10만명 군비 제한으로 정규군 병력이 적었기에 온건 좌익 사회민주당 정부조차 민병대를 묵인했다.[19] 바이에른 주정부, 군, 경찰에서 참여한 정황 때문에 라이프치히 제국 대법정에서 판결해야 하는데도 바이에른 임시재판소에서 재판한다. 그덕에 이미 재판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20] 완전히 합법적으로 총통이 된 건 아니었다만 적어도 히틀러가 총리가 될 때까지는 합법적이었다.[21] 상술했다시피 개인 단위의 자유가 아닌 (1차대전 승전국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22] 실제로 브뤼닝 내각에서는 공산당의 발의한 불신임안을 나치가 찬성했다가 사민당의 거부로 부결되었고 파펜 내각에서는 모든 정파가 협조해서 압도적인 차이로 불신임안이 채택된다.[23] 굽시니스트는 '저기에 불지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누구나 똑같구나.'라는 평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범인은 용자로 추앙받았을지도 모른다. 덧붙여 당시 독일에서 방화 사건은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최고 형량을 사형으로 개정한뒤 법을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그 때문에 소급 입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24]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의사당 방화가 나치의 자작극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역사학계에서 밝혀진 바로는 정신 이상에 걸린 사회주의자가 단독으로 불을 지른 것. 나치에겐 정말로 기막힌 타이밍에 일이 적절하게 터져주었기에 거의 천운이 따랐다고 할 정도. 물론 세계적으로 보면 큰 불행[25] 당시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손잡고 나치에 강경하게 싸웠으면, 히틀러가 순조롭게 집권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당 평당원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렇게 큰 근거는 없다. 슐라이허 총리는 몇달 전 사회민주당보다 더 한 나치 돌격대 40만과 공산 깡패들의 폭동이 함께 일어났어도 제국군 병력과 프로이센 무장 경찰로 충분히 막았을 거라 판단했다. 사민당의 봉기 계획 자체가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 경찰'이 아군을 해준다는 전제하에서 짜여진 것이라서, 프로이센 주와 경찰이 나치에 완전히 장악당한 시점에서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26] 본디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퓌러'라는 직함을, 공식적인 직함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며, 법적으로 대통령에 해당하는 권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의 직위는 공석으로 남았다. 일본에서 영향 번역시에 퓌러와 총리+대통령 직위를 묶어서 총통으로 번역했지만 원래는 각각 다른 직위였다.[27] U보트 부대장, 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이어 히틀러 자살 후 제국 대통령을 지낸 카를 되니츠 원수는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처칠의 이 말을 인용하며, 당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선택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런던데리 경은 아예 골수 나치빠였다.[28] 제2혁명을 주장하며 돌격대 봉기를 역설했고, 종전의 귀족적 군대를 대체하고 민중적 돌격대를 민족국가의 무장력으로 내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도 이런 주의였으나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갈아탄 상태였다.[29]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영화 중 히틀러에 대해 언급을 많이 하는 거고 발퀴레 작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등과 같이 히틀러만 죽이면 나치 독일은 끝이나 다름이 없어서 히틀러 암살 작전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30] 국내에선 "사회주의 제국당"이라는 번역도 많이 쓰이고 있다.[31]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쿠데타를 진압했던 그 레머 소령(토마스 크레치만 분) 맞다. 다만 이 양반은 장군 시절엔 무능하다고 상당히 뒷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32] 독일에서 정당은 해산시킬 수 있지만 정치단체는 심각한 사고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자기네끼리 굿을 하건 떡을 먹건 별 신경을 안쓴다. 간단히 말해 미친 놈들끼리 노는 건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33] 공정한 룰로 복수정당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에 관련한 부분을 심각하게 벗어나면 독일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정당 해산이 가능하다. 이것의 좋은 예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공산당은 볼셰비즘을 기반으로 한 스탈린주의적 1당 독재체제를 기본 노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해산당했다.[34]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를 다니다가 때려치고 시인 평론가가 된다. 후에 나치당 초기 아무런 배경이 없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35] 러시아 제국 망명 교포로 모스크바에서 정식 건축가 교육을 받았다.후에 나치 이론가로 나치당 인종국장을 맡았고 2차 대전 시기 오스트란트(발트3국)장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36] 정확하겐 세관장이다. 국경 도시 브레우나우 출신으로 히틀러의 아버지는 그 도시 세관장이었다. 아버지가 은퇴 후 린츠로 이주한다.[37] 1934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나치당 인사 신분으로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하버드의 흑역사로 꼽힌다.[38] 중퇴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18세때 자원 입대하여 중퇴가 아니라 참전자 혜택으로 조기졸업 처리 되었다.[39] <히틀러 국가 Der Staat Hitlers(1969년)>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szat) 著[40] 영미 약탈 자본은 유대인에 장악되었다면서 독일인의 산업 자본은 유익하다곤 했다.[41] 당시는 공산주의라는 말보다 레닌시대 공산주의는 볼셰비즘 공산당은 볼셰비키로 불렀다.[42]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노-자 대립보다 특정한 분석 틀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성향은 드물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정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그렇고, 특정 성별의 근본주의자들도 그렇고, 특정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이 그러하다.[43] 현재에도 미국을 이미 장악한 유대인 자본의 세계 장악론을 꺼내는 사람이 있다.[44] 나치에서 사회주의뿐 아니라 예술 문화 면에서 국제적인 요소를 띄는 사상이나 성향은 무조건 유대인 음모론 드립으로 흐른다.[45]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오언의 유토피언 소셜리즘,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등.[46] 귀족사회주의, 봉건사회주의, 민족사회주의, 20세기 초중반 영국 보수당이 내세운 토리 사회주의 등이 이에 속한다. 즉, 본래 의미의 '사회주의'라고 보기 힘든 우파들이 내세운 변종 사회주의를 이리 칭한다.[47] 당연히 좌파라고 해석하는것도 (자유지상주의 계열 중에서도 극단적인) 영미 극우파들이나 하는 헛소리이다. 실제로 비-대안우파 자유지상주의계열 미국 보수파 내지 극우파들은 엄연히 극우파인 대안우파도 좌파라고 칭하기도 한다. 걍 지들 맘에 안들면 다 반대 진영.[48] 현대 유럽의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사회주의까지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사민주의 비스무리한 친복지정책을 내세우는 것과 비슷하다.[49] 다만 T4 작전이 행해졌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선천적이고 국가에 불필요하고 오히려 비용이 들어가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자들은 예외로 간주되었다.[50] 그나마 라인하르트처럼 유능+실천이 겸비된 경우는 창작물이 아니더라도 찬양받는다. 당장에 세종대왕도 유능한데다가 또 재주를 살려서 업적을 남겨서 존경받는다.(이쪽도 엄밀히 보면 전제군주제의 군주라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독재국가의 군주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히틀러는 무능하고 무능해도 피해를 안끼치면 욕을 덜먹는데 피해까지 끼치니 욕을 처먹는거다. 단순히 무능한것만으로는 이정도로 욕먹진 않는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경우 사적으로는 대범한 면이 많았지만 은근히 쪼잔한 면모도 있었고 공적으로는 학살 묵인, 호승심에 의한 패전, 책임 회피, 부하 관리 실패, 자가당착 모습(스스로 정정당당한 승부 등을 주장했지만 남의 손을 타서든 스스로든 '더러운 짓'도 일삼았다.) 등 다양한 결점들이 있었고 세종대왕도 업적이 워낙 많아 그렇지 사적이나 공적이나 비판할 점도 많았다. 특히 사적인 면을 보면 계유정난의 단초를 제공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라인하르트는 전제군주제의 유능한 군주를 대변하는 인물, 세종대왕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데도 이모양인데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다.[51] 에른스트 칼텐부르너가 대표적 인물[52] 나치당에 몸 담았다가 1939년 돌연 망명해서 히틀러에게 속았다고 책을 낸다. 독일 최대 재벌 크루프사의 데릴사위다. 국내에도 있는 엘리베이터 브랜드 티센크루프의 그가 맞다. 히틀러를 키워줬다고(?) 일부 출판물서 은막의 제왕겸 최종보스(?)로 꼽히는 후겐베르크는 크루프에서 월급사장이나 했던 인물이다.[53] 대입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다. 당시 좌익=공산주의 이념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계급투쟁을 주장했으니까.[54]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에선 1950년대 국가노동자당 같은 정당이 되레 노동당과 척을 지고 보수당과 통합되거나 지금도 독일에선 기독교사회당이 우파 컨셉으로 기민련과 연립내각을 구성하기도 하는 등 명칭만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55] 헤르만 괴링이 나치당 내 가장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른 당원이였다. 일화 중에 이탈리아제 스타킹 같은 제품들을 몰래 밀수업자에게 팔다가 게슈타포에 딱 포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사했더니 모르핀중독 관련으로 정신병원에(?!) 반강제로 치료받았고 또 여러번 조사당했다.[56]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생일날에 은근슬쩍 암묵적으로 참석자들에게 선물을 가져올 것을 종용했고 참석한 당원들이나 지인들은 내심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57]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시민들은 소련군이 도달하기 30분 전에야 소련군이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통보했다. 동부전선 뿐 아니라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진공으로 전선에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나치당은 서부전선의 독일 국민들을 사실상 방기했다.[58] 그나마 보면 독일쪽이 쥐톨만큼 나았다.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국민들에게 자살을 강요해 실행에 옮겼지만 독일은 히틀러가 비슷하게 미쳐날뛰긴 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기 때문[59]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종북주의자일베충이 사회적으로 생매장 당하듯, 이들은 이미 주류사회에서 병신 취급을 받고 있으므로 논외. 웃는 히틀러가 등장하는 광고 및 나치 코스프레 카페에 대해서 이스라엘 대사관과 주한 독일 대사관측이 강력 항의한 적이 있었다.[60] 프랑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지방의원 선거에 이르기까지 국민투표를 제외한 모든 국정선거에서 결선투표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극우정파가 세를 확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지층이 제법 많다보니 투표율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에는 간간히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기도 하고 2002년 대선에서 장 마리 르 펜이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당시 총리가 지나친 표의 분산으로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바람에 결선에 진출한 바가 있다. 물론 2차에선 82:18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시라크에게 패했지만.[61] 처칠 왈 우리는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것이다.[62] 처칠이 연설에서 "우리 후손들은 이 시대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라 부를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63] 다만 이쪽은 "죄다 까세"에 가까운 입장이라... 그런데 이 사전에서 독일을 입력하면 그냥 하켄크로이츠 반짝이는 화면만 나온다. 이전에 독일문서에 나치드립 엄청 쳤다가 수정전쟁 벌어지고 "걍 독일은 나치"라는 뜻으로 하켄크로이츠 반짝이만 나오는 듯.[64]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네덜란드계,영국계 백인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네오나치 정당을 만들어 하켄크로이츠를 휘두르고 돌격대 제복을 입거나 흑인들을 모든 중앙권력에서 배제하며 흑백 평등을 주장하는 흑인이나 백인들을 위협하거나 살해하며 나치를 찬양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쪽도 훗날 나치즘 비슷한 짓을 하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아프리카 탈식민화 과정에서 서유럽의 식민지였던 모든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흑인 국가로 독립할 때 백인 지배를 역행하는 통에 남아공과 로디지아 두 나라 모두 국제 왕따가 된다~~(참고로 그 아파르트헤이트는 사상적으로 나치즘, 파시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맞다.)[65] 합스부르크 일족도 히틀러를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일족의 얼마 안 남은 후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전시에 나치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정도.[66] 특히 1999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인민당(우파정당)을 제치고 득표율에서 2당을 차지했다(의석은 인민당과 같은 52석.) 이를 바탕으로 한동안 인민당과 연립정부을 구성하기도 했다. 총공깽.[67]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전사자의 80%가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68] 특히 이 동네는 네오나치 같은 행동을 하면 사형이나 무기징역도 받는다.[69] 폴란드 국립 기념원(Instytut Pamięci Narodowej, 약자 IPN), https://web.archive.org/web/20120323161233/http://niniwa2.cba.pl/polska_1939_1945.htm[70]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 1931년 통계에 의하면 폴란드 전체 인구 중 폴란드인 68.9%, 우크라이나인 13.9%, 유대인 10%, 벨라루스인 3.1%, 독일인 2.3%, 기타 2.8%로 구성되어 있었다.[71] 폴란드 엘리트층의 희생이 막심했던 이유는 나치가 폴란드 엘리트층을 모두 제거하여 폴란드 민족을 노예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엘리트의 상당수가 유대계였으니 독일에게는 그야말로 비오는 날 대청소였던 셈.[72]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가 압력을 넣어준 덕에 발칸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빼앗긴 남도브루자 등 흑해 연안의 영토들을 루마니아로부터 수복했으나, 아예 홀로코스트에 참여하라는 나치독일의 유대인 호송 압력에도 자국내 유태인 국민들을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등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인도하지 않고 적극 보호했으며, 독소전과 서부전선에 대한 독일의 불가리아군 참전 요청도 거부한 바 있었다. 그리고 당시 불가리아 민중들 또한 독일을 썩 좋아하진 않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중에도 불가리아 조국전선 등 나치독일군에 대항하는 반독 게릴라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불가리아 국내의 나치 독일군과 군사고문단, 외교관들을 공격하거나 죽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치가 패망하고 불가리아가 공산화 된 직후에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토도르 지프코프도 제2차 대전 당시 반나치 게릴라 세력들을 지휘하며 나치 독일군대와 싸우던 인물이었다.[73] 당장에 추축국 아이디어를 짠 나라가 어디인지를 생각해보자.[74] 대표적으로 헝가리의 요빅당 등[75] 사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 추축국의 주요국가들의 악행이 커서 그렇지.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으로 추축국과 맞서 싸우던 다른 서유럽 열강들도 식민지였던 여타 나라들에서는 잔인하고 억압적으로 통치한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76] 현대 크로아티아와 달리 2차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는 추축국에서 세워준 일종의 괴뢰국이었다. 영토 자체도 실제로는 냉전시기 유고연방보다는 조금 작은 정도였다. 당시 크로아티아인들은 대부분 나치, 우스타샤에 우호적이였다. 그러니 강제부역이라 하기도 뭐하다..[77] 정작 SS등은 감탄했다고 한다.[78] 여기에는 라울 발렌베리의 덕이 컸다. 발렌베리 항목 참조[79] 그래서 종전 이후에도 대놓고 패전국 일원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종전 이후에는 소련에 상당한 배상금을 갚고 소련의 눈치를 좀 보아야 했다.[80] 나치가 쳐들어오자 체급 자체에서부터 도저히 맞설 수 있는게 아니라서 별 저항없이 항복해 국가체제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으나 애당초 좋아서 항복한게 아니었기에 덴마크 왕 크리스타안 10세는 끝까지 나치에 비협조적이었다. 히틀러가 보낸 생일을 축하하는 매우 긴 전문조차 짤막하게 '매우 고맙소' 라는 답변만 했을 정도였으며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까지 행했다. 물론 덴마크 사람들도 나치에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덴마크 영화 랜드 오브 마인에서도 덴마크인들이 독일 패잔병들을 유태인 죽인 손으로 신성한 덴마크 국기를 만졌다는 이유로 구타하는 등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존재로 보는 묘사가 나온다.[81] 나치가 덴마크 국왕의 반응에 빡쳐서 독립시켜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와 별개로 나치 자체에 대해선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당시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본국의 사이가 딱히 나쁘지도 않았거니와 독립시킨 거와 이들의 만행은 별개이니.[82] 이 '강요당한 부역질'에 관해서는 노르웨이/역사 항목을 참고할 것.[83] 징역 21년+5년 예방구금으로 수감자가 갱생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경우 사실상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이다.[84] 반대로 한국인, 중국인에게 서양인이 일본군 복장하고 와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한다고 상상해보자. 딱 그 느낌이다.[85] 현대 독일에서도 미국, 캐나다처럼 개인의 총기소지가 가능하다. 다만 제1,2차 세계대전의 전과가 있는 나라인지라 미국보다는 한층 더 엄격한 편.[86] 물론 임시정부는 대독선전포고를 하지만 딱히 나치랑 엮일 일이 없어서 악감정이 생길 일조차...[87] 다만 나치가 국민당을 지원한 점에서 일종의 대리전으로서 간접적으로 대립하기는 했다.[88] 한때 중국에서 반프랑스 시위때 프랑스를 나치라 비하하고(비유하자면 한국을 일본놈이라고 비하하는 것과 유사하다!) 대만의 중화민국도 이미 나치와 교류한 시절인 장제스 세대 인사들은 대부분 은퇴했거나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나치에 대해선 비판적이다.[89] 호메이니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크게 적대적이지 않고 시오니즘이나 이스라엘을 오히려 가짜 유대인들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롭힌다고 적대시했으며, 자기자신도 우리는 히틀러같은 싸이코랑은 다르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좀더 자세한 내용 추가바람[90] 전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법이다. 이전에도 동물을 보호하는 취지의 조항이 있었는지는 확인바람. 여튼 법전내 항목을 개설한 최초의 동물보호법.[91] 칭기즈칸이 금과 송을 공격할 때 '유목민에게 도시와 농경지는 필요없다'라며 점령지를 모조리 초토화시켜 목초지로 만들려고 했던 것을 두고 간간이 회자되는 농담이다.[92] 이경우 우랄 산맥 동쪽의 러시아,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는 추축국의 승리를 가정한다면, 일본제국령일 가능성이 크다.[93] 단,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일 경우 감염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주인공들이 고뇌하거나하는 전개가 나오기도 하고, 독자들도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기는 한다.[94]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아예 나치 좀비라는 괴상한 물건까지 만들었다.[95] 실존인물(일제 코흐, 1906~1967)이다. 물론 마구 쏟아져 나온 영화는 각색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도 SM에 변태성욕자였다고 한다. 정보[96]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나치는 동성애자들을 싸그리 모아 수용소에 집어넣고 강제노역을 시킨 집단이다. 게이들의 상징 중 하나인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도 나치들이 동성애자들에게 붙인 문양에서 유래했다.[97] 다만 괴링처럼 전 재산을 뺏진 않았다.[98] 현가로 30억 달러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