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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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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6.25 전쟁 정전 협정 이후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에 대한 내용은 군사분계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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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三八線 | the 38th parallel
파일:삼팔선 및 휴전선.png
삼팔선과 군사분계선의 비교[지도해설]
<colbgcolor=#000><colcolor=#fff> 접경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북한|]][[틀:국기|]][[틀:국기|]]
경계 설정일 1945년 8월

1. 개요2. 역사
2.1. 발효
3. 경유 지역
3.1. 지형지물
4. 문제점
4.1. 미국의 조정 시도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

[clearfix]

1. 개요

삼팔선일본 제국항복 직후인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 광복을 맞이한 조선에 미군소련군이 진주,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북위 38도 위선을 기준으로 설정한 경계선이다. 총 길이는 312km 이며 이는 군정이 끝나고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실질적인 경계선 역할을 하다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무효화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으로 현재의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

삼팔선에 대한 지정학적 유래는 러일전쟁 이전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에 제시했던 절충안 가운데,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양분하자는 구상이 최초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동양의 신생 제국으로 생각하던 러시아는 이러한 제의를 무시[2]했고, 일본은 이후 러시아와의 대결 노선으로 돌아서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영국을 등에 업었다. 나중에 러시아 측에서 39도선 분할을 재차 제의했지만 이 때 이미 외교적 수세라 판단한 일본은 제의를 무시했고, 양국의 긴장은 러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일본군은 38도선 이북은 관동군이, 38도선 이남은 조선주재 일본군(17방면군)이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일본이 남북 분단을 예견 또는 유도했다'는 설을 제기하나, 이에 관해서는 명확한 인과관계가 부족한데다[3] 상술했듯 한반도를 특정 위도선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러일전쟁 이전부터 나왔던 것이므로 특별한 정치적 판단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적어도 근대 이후 북위 38도선이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은 이북 지역에 비해 면적이 좁지만 인구는 2배 정도 많은 데다 수도 서울을 포함하고 있는 대신 이북 지역은 면적이 더 넓으면서 북부 지방의 요충지인 평양이 있기 때문이다.[4]

2.1. 발효

"당신은 지금 38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미 육군 제728 헌병대-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8월 8일 소-몽 연합군이 물밀듯이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만주에 100만 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소련군에 의해 1주일 만에 무너졌고, 8월 15일 청진시까지 점령한 소련은 쇼와 덴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렇게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소련과 협상했다.

미군은 아직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계선 정도로 협상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군 사령관은 삼팔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삼팔선 이북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때 미군이나 연합군은 한반도에 없던 상황에서 소련이 먼저 삼팔선을 봉쇄하고 북한을 준비해둔 계획대로 공산화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다른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5]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겠다고 하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게 되었다.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러나 북한을 일제로부터 자유를 주러 온 해방군이라고 선전하고 포섭한 소련은 1945년 8월 26일 공식적으로 삼팔선을 봉쇄하면서 전화 통신, 물자의 왕래 등 대부분을 끊고 당분간 민간인의 통행은 모르는 척 했을뿐이다.

3. 경유 지역

삼팔선은 서해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옹진군 - 벽성군 - 해주시[6] - 벽성군 - 연백군 - 경기도 개풍군 - 개성시 - 장단군[7] - 파주시 - 연천군 - 포천시 - 가평군 -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 춘성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양양군을 통과한 후 동해에 닿는다.

3.1. 지형지물

다음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기준의 삼팔선 통과지역의 지형지물과 좌표이다. 삼팔선이 지나는 곳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교차하는 곳은 백령도 동쪽 앞 바다, 경기도 연천군 매현리와 개성시 장풍군 매현리(1945년 8월 14일 기준으로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매현리)이다.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쪽에 위치한 대한민국 실효지배 지역은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백령도를 제외한 지역 기준으로 38선을 통과하는 도로 앞에 "여기는 38선입니다" 등의 38선 표지석, 표지판이 있다. 38선 표지석, 표지판은 38선 반경 1km 이내의 도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다. 아래의 지형지물은 바다, 산, 하천, 호수, 교통시설, 마을, 관광지 같은 곳이다.
실효 지배국 주소 지형지물 소수점 좌표
대한민국 백령도 앞 바다 38 124.700000
서해 북방한계선 교차점 38 124.850000
북한 운동저수지 38 125.310000
해주만 38 125.640000
해주시 털섬 38 125.696950
해주만 38 125.740000
배천군 배천읍 일대 38 126.310000
예성강 38 126.400830
경의선 38 126.445700
개성평양고속도로 38 126.510290
송악산 일대 38 126.550470
육상 군사분계선 교차지역
(개성시 장풍군 매현리, 경기도 연천군 매현리 일대)
38 126.812470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노곡리의 38선 마을 인근 38 126.916670
자유로CC 38 126.949990
임진강 38 126.964990
37번 국도(동서로) 38 126.988320
3번 국도(평화로) 38 127.070000
경원선(수도권 전철 1호선) 38 127.075730
신천 38 127.076660
87번 국도(포천로) 38 127.167910
37번 국도 38 127.235980
포천천 38 127.238050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일대 38 127.242500
관모봉 38 127.281100
47번 국도(금강로) 38 127.340550
75번 국도(가화로) 38 127.441400
화악산 일대 38 127.507500
341번 지방도(화악산로, 화악터널) 38 127.525955
화악산 일대 38 127.540500
5번 국도(영서로) 38 127.641800
북한강(춘천호) 38 127.650000
407번 지방도(춘화로) 38 127.732210
구 46번 국도(배후령길, 배후령 일대) 38 127.790550
46번 국도(춘양로, 배후령터널) 38 127.794950
오봉산 일대 38 127.806100
소양강(소양호) 38 127.926100
소양강(소양호) 38 128.042500
46번 국도(삼팔선로) 38 128.05180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 빙어마을 일대 38 128.10100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설악로 1112 44번 국도 38 128.11538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남전리 1100 하늘내린도리안공원 38 128.16207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75-22 인제 자작나무숲 일대 38 128.19865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회동길 40 자작나무마을 인근 38 128.23631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북리 1396 소양강 38 128.28055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내린천로 4886 31번 국도 38 128.2812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북리 1500 인제 스피디움 컨트롤타워 38 128.2917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산71 가칠봉 이남 450m 38 128.42752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1024-16 방태천 38 128.4866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산71-79 조침령 일대[8] 38 128.5083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영덕리 산81-63 서울양양고속도로 서양양IC + 0.6km 38 128.53652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272 56번 국도 38 128.5376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272 로드박스 (카페) 38 128.53787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영덕리 444 영덕호(후천) 38 128.5405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용소리 산1 정족산 이북 180m 38 128.575495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남대천로 1179 59번 국도 38 128.63839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부소치길 5 놀골교(양양남대천) 38 128.6410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산168 한천산 이남 750m 38 128.6647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송이로 486 418번 지방도 38 128.68041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산124-2 동해고속도로 남양양IC + 11.6km 38 128.7155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동해대로 1176 7번 국도 38 128.737350

4. 문제점

파일:attachment/38th_sign.jpg
38선 팻말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너무나 인위적인 분계선이었다. 같은 분단국인 월남(베트남)도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되었지만, 실제로는 북위 17도선보다 약간 남쪽인 강을 경계로 분단된 것이었고 남북으로 긴 영토 특성상 길이도 짧았다. 북위 38도선은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 고립된 지역 발생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반도는 남한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월경지가 되었다. 또 38선 이북에 위치한 해주의 경우 해주항이 위치한 용당포 일부 지역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해주항 일부가 월경지가 될 판국이었다. 때문에 해주의 경우 용당포를 포함한 해주 전체를 소련이 관할하고 38선 이남의 해주만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으로 미군정과 소군정이 합의를 해서 월경지가 생기는 건 피했으나 해주항과 서해를 연결하는 해주만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6.25 이전까지 해주는 이름처럼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정작 바다를 쓰지는 못하는 무늬만 항구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9]
  • 강제 분리되는 행정구역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面)이나 (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10]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 방어상의 문제점
    이는 특히 남한 측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11]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고[12] 실제로 이 지역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결국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부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38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13]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38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 미국의 조정 시도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38선은 남북의 경계선으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선이었고 1945년 11월에 미국 국무부는 주 모스크바 대사인 해리만 통해 소련과 38선 경계 조정을 협상하도록 지시했는데, 당시의 안은 38선 이남의 황해도를 소군정으로, 38선 이북의 경기도를 미군정으로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1월의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가 소군정 책임자인 테렌티 시티코프[14]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1. 황해도의 38선 이남 지역을 소 군정 관할로 한다.
  2. 경기도의 38선 이북 지역을 미 군정 관할로 한다.
  3. 강원도는 38선과 근접한 행정구역(시군) 경계를 따라 관할 경계를 재조정한다.

이 안에 따르면 강원도는 철원-김화-양구-인제-양양 및 그 이북이 소 군정, 화천-춘천-홍천-강릉 및 그 이남이 미 군정 관할이 된다.[15] 그러나 소련측이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음[16]으로써 실제 경계가 조정되지는 못했다.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

6.25 전쟁정전 협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군사분계선(휴전선)과 삼팔선을 오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외국 언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인들도 현재의 경계선이 군사분계선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휴전선 대신 삼팔선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삼팔선은 휴전선보다 존속기간은 훨씬 짧지만 아무래도 최초로 남북한을 갈라놓은 정치적인 경계선이고 어감이 더 좋은데다가 지구상의 위도선을 기준으로 했다는 사실이 인상 깊게 남는다는 점 등이 꼽힌다.[17]

휴전선은 1953년 휴전회담 이후에 설정된 선으로 38선과 비교해 보면 개성을 포함한 경기도 서북부와 황해도 연백평야, 해주 이남의 옹진반도 부분은 북한이 좀 더 남하하였고 거꾸로 연천, 포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설악산, 간성, 거진 등을 포함한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지역은 남한이 북상했다. 때문에 혹자는 태극기태극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평지는 북한이 더 많이 먹었고 남한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와 영토 자체를 더 많이 먹은 셈이다. 남한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38선 때보다 최단거리가 북한에 약간 가까워졌지만, 방어에는 더 유리해졌다.[18]

왜 이런 모양이 나왔나면 1951년 4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UN군에 의해 격퇴된 이후 전황이 교착화 양상이 되자 6월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회담장소가 판문점이었고 그 때문에 그 주변인 서부전선쪽에선 전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협상이 완료되기 전까진 한뼘이라도 땅을 넓히려는 양쪽의 지루한 공방전이 동부전선 쪽에서 장장 2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UN군이 북으로 야금야금 밀고 올라간 결과 저런 모양이 나온 것이다. 김영옥(군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공군의 1951년 여름까지 이어진 대공세 이후에는 UN군이 오히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고지전을 전개하여 전선을 밀어올리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상술한 판문점 인근에서도 1953년 6월경에는 국군 해병대를 주축으로 해서 거의 개성 인근까지 연백평야 일부분을 전개하고 있다가 휴전 성립 직전에 예성강철교를 끊고[19] 수복지를 내준 후 퇴출해 와야 했다.

사실 38선 당시보다 군사분계선인 현재 서울특별시가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맞지만 주로 드는 강서구(구 경계 기준 휴전선과 24km)의 예시는 좀 잘못되었는데, 직선거리상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강서구는 휴전선이 그어진 1953년 당시 애초에 서울의 영역이 아니었고[20] 이후 1963년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서울특별시의 영역 확장과 맞물려 서울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1953년 당시의 서울 시계 기준으로 38선이나 휴전선이나 직선거리는 거의 비슷했고[21] 한강 하구와 임진강을 경계로 서쪽 돌출부만 방어하면 되는 휴전선이 의정부 방면에서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 38선보다 방어에는 훨씬 유리했다.

6.25 전쟁 직전에 개성시에서는 "1950년은 단기 4283년인데 4283을 거꾸로 하면 3824 3×8=24여서 이 해에 38선이 이사 가서 통일이 된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단기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북한이 아니라 남한 쪽이었다. 단군은 신화, 대종교의 인물이므로 공산주의 정부[22]에서는 단군기원을 쓸 이유가 없었다.


[지도해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기된 지역은 삼팔선 획정 후 남한 관할이었다가 휴전 후 최종적으로 북한에 편입된 지역으로 북한에서 신해방지구라고 부르는 지역이고, 파란색으로 표기된 지역은 삼팔선 획정 후 북한 관할이었다가 휴전 후 최종적으로 남한에 편입된 지역으로 남한에서 수복지구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해주 용당포는 아슬아슬하게 북위 38선 이남에 위치하나, 전쟁 이전 북한이 실효지배했다. 또한, 1953년 휴전 당시 북한의 상세한 국토면적은 약 123,369㎢, 남한의 국토면적은 약 97,534㎢로 현재의 남북한 면적보다 좁았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 농업 부지 확보 등의 이유로 지난 반세기 동안 간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국가통계포털 자료 참조).[2] 여담으로 이를 황성신문에 보도한 남궁억은 일본의 압박을 받아 투옥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내려왔다.[3] 아래에도 나오지만 미국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제안한 것이지 관동군의 위수지역 때문에 38도선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반으로 나누는 기준을 38선으로 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4] 흥미롭게도 38도선이 지나가는 임진강도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남부세력과 북부세력의 자연경계선 역할을 해왔다.[5] 부산, 인천, 원산[6] 다만 해주 시가지의 거의 전체는 북위 38도선 이북이고, 해주항의 남쪽으로 돌출된 일부분만이 38도선 이남이라 딱 이 작은 부분만 따로 관리하기 너무 힘들어 그냥 남북간에 합의해서 해주 전체를 북쪽이 관할했다.[7] 남한령 장단군은 한국전쟁 이후 파주군연천군에 분할 편입.[8] 조침령옛길 70m 이북으로 38선이 지나간다.[9] 이 점을 이용해서 해주시 자체가 북한 주민들의 주요 탈북 루트가 되기도 했다. 항구를 경비 중인 경비대만 따돌려서 배만 띄우면 바다가 미군정 관할이라 경비대가 잡을 겨를이 없었다.[10] 정확하게는 38선이 송악산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 사면을 지났다. 육탄10용사도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11] 위에서 언급한 송악산이나 옹진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감제고지인 국사봉 등등.[12] 그래서 전쟁 직전인 1949년에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해방 전후에는 원래 개성부립박물관이었다가 1946년에 개성분관 승격.)에서 소장하던 고려시대 문화재, 특히 고려청자까지 옮길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미리 서울로 옮겨놓고, 전시에도 이 유물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유사시 개성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건 전쟁 이전부터 예상되고 있었던 것. 김 관장의 이러한 문화재 이전 작업 덕분에 개성분관이 소장하고 있던 고려 유물들은 대부분 무사히 남한에 있으며, 북한이 개성을 점령했을 때 개성분관은 일부 부동산 문화재만 남았을 뿐 텅텅 비어 빈털터리로 시작해야 했다.[13] 다만 인구수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된 마당에 농사나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대거 군대로 보내버리는 무리를 해서 소련 측에서도 감축을 하라며 우려를 표했을 정도다.[14] 당시 소군정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이나 그는 정치는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장교인 시티코프에게 군정 업무를 일임했다.[15] 현재와 이 당시 행정구역의 차이로 인해 이론상으로는 현재 화천 관할이나 당시 춘천 관할이던 사내면은 미군정 관할이 되며, 반대로 현재 홍천 관할이나 당시 인제 관할이었던 내면은 소군정 관할이 된다.[16]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설도 있음.[17]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이 "38선 밑으로는 골목까지 훤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18] 38선 때는 개성 대신 현재 남한 땅인 연천, 포천 북부가 북한이었는데, 개성은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방어선이 있지만 연천, 포천은 별다른 자연의 방해 없이 서울로 침투할 수 있다. 실제로 6.25 때 서부의 파주 축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비교적 잘 방어했는데 포천-의정부 축선에서 구멍이 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여담으로 38선 돌파비가 있는 연천 한탄대교 사거리에서 수유역까지 마라톤 풀코스 거리가 나온다.(3번 국도 평화로-도봉로 루트) 그만큼 서울 강북 지역이 38선과 상당히 인접해 있다는 것이다.[19] 개성시를 지나 해주시로 이어지는 협궤철도 토해선의 철교로 북한군이 이용하지 못하게 파괴했다.[20] 당시에는 김포에 속했다.[21] 물론 당시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도 휴전선이 조금 더 가까웠지만 생각만큼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1963년 서울의 대확장 과정에서 휴전선 돌출부와 가까운 방향으로도 확장이 이루어져 지금과 같은 지도가 된 것이다.[22] 단군릉을 조작하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1990년대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