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06:17:40

핌 포르타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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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 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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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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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빌헬뮈스 시몬 페트뤼스 포르타윈
Wilhelmus Simon Petrus Fortuijn
파일:Pim Fortuyn.jpg
출생 1948년 2월 19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펠선
사망 2002년 5월 6일 (향년 54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힐베르쉼
학력 암스테르담 대학교 (사회학 / 편입)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사회학 / BSS)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사회학 / MSS)
흐로닝언 대학교 (철학 / Ph.D.)
종교 가톨릭
성적 지향성 게이
소속 정당 [[노동당(네덜란드)|
노동당
]] (1974-1989)
[[자유민주인민당|
자유민주인민당
]] (1990년대)
[[살기 좋은 네덜란드|
살기 좋은 네덜란드
]] (2001-2002)
[[살기 좋은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 (2001-2002)
[[핌 포르타윈|
핌 포르타윈 명단
]] (2002)
약력 흐로닝언 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에라스뮈스 대학교 사회학과 특임 교수
주간지 Elsevier 편집장 (1993-2001)
로테르담 시의원 (2002)
1. 개요2. 생애
2.1.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로2.2. 사민주의자에서 신자유주의자로2.3. 신자유주의자에서 반이민 운동가로2.4. 정계 입문2.5. 암살
3. 평가
3.1.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미친 영향3.2. 현대 우익 정치에 미친 영향3.3. 네덜란드 내에서의 평가
4. 선거 이력5. 여담
[clearfix]

1. 개요

Pim Fortuyn

네덜란드의 정치인, 철학자, 사회학자.

오늘날 유럽 우익 대중주의 정치의 아버지 격 대우를 받는 인물로, 특히 네덜란드의 현대사에서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2004년 네덜란드 공영 방송에서 조사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을 만큼[1] 네덜란드 우파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대우받고 있다.

2. 생애

2.1.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로

1948년 2월 19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주의 펠선(Velsen)에서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났다. 포르타윈은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이후 보다 실용적인 학문인 사회학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967년 암스테르담 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981년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가 사회학도 시절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과 철학 전반이었다. 포르타윈은 네덜란드의 사회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호했으며, 네덜란드 공산당(CPN)에도 호감을 가지고 공산당에 투표했다.[2]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재직하던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갈등론 사회학을 가르치는 부교수였다. 포르타윈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가 네덜란드 특유의 사회 분위기를 혐오했기 때문인데, 그는 비록 개인적으로 가톨릭을 믿었지만 기독교 엄숙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1960년대 전후의 네덜란드 사회 분위기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를 변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화주의,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68년 혁명을 전후하여 프라하의 봄 등 여러 일련의 사태와 관해 포르타윈과 네덜란드 공산당 지도부의 생각이 같지 않아지자 포르타윈은 공산당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포르타윈은 자신을 "무당파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당에 가입하고 좌파적 사회 민주주의로 노선을 전환한다.

2.2. 사민주의자에서 신자유주의자로

1980년대 포르타윈의 정치사상은 다시 변동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에서 복음주의 철학에 기반한 신보수주의를 주장하자, 포르타윈도 그 영향을 받아 사회 민주주의보다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이 개인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관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해 전체 공무원의 절반을 해고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했다. 결국 1989년 그는 노동당 당적을 정리하고 보수 우파 정당인 자유민주인민당에 입당해 잠깐 활동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인민당의 사회관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 얼마 안 가 당을 탈당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전통적 보수주의자유주의(진보주의)를 모두 혐오하였다. 그는 68 혁명을 통해 확립된 네덜란드의 진보적 정체성이나, 그 이전의 개혁 교회의 영향을 받은 귀족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모두 반대했다. 그의 지향성은 가톨릭 공동체주의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계몽주의였고, 고전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포르타윈은 68 혁명으로 네덜란드를 떠받들고 있던 공동체 정신이 붕괴되며 아버지(공동체)도 어머니(종교)도 없는 "고아와 같은 사회"가 네덜란드 사회의 현주소라고 공격하며 네덜란드의 개방적인 정서를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LGBT 권리, 대마초 합법화, 세속주의, 페미니즘, 언론의 자유 등 되돌릴 수 없게된 네덜란드의 여러 가치를 지지했다. 그는 특히 공화주의를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기독교 정신으로 되돌아자고 주장한 네덜란드의 상류 보수층과 네덜란드 왕실을 비난하는 양비론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동성애자에다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인 사회 해방론을 공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무리하게 네덜란드 사회가 이미 합의한 의제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 거시적으로 네덜란드 사회가 극단적 개인주의와 관료주의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네덜란드의 진보적인 가치 그 자체를 네덜란드의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으로 삼아 68 혁명으로 무너진 공동체주의를 되살리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포르타윈의 특이한 정체성은 네덜란드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과 뜻이 맞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언론 활동을 하며 대외적으로 인지도를 쌓아나갔다.

2.3. 신자유주의자에서 반이민 운동가로

파일:763.jpg
2000년대의 포르타윈[3]

1990년대 후반 포르타윈의 정치적 성향은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관심사는 이슬람교도들과 아랍권 이민자들이었다.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계속 무슬림 이민자들이 네덜란드로 유입되고 기존 네덜란드인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자 포르타윈은 무슬림들이야말로 네덜란드의 진보적 가치를 무너트릴 위협 요소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인 무슬림에 대한 주류 정치권의 공격은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포르타윈은 이 점을 노려 더욱 맹렬히 이슬람교를 "후진적 문화"라고 공격했고, 네덜란드가 상징하는 자유주의, 세속주의적 가치에 위배되는 반동적 보수주의의 세력이라고 칭했다.
저는 이슬람을 개인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후진적인 문화"에 갇혀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옛날 네덜란드의 개혁 개신교와 같습니다. 개혁 교회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을만큼 가혹한 기준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네덜란드를 봅시다. 네덜란드처럼 동성애자 당 대표가 공개적으로 선거 유세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네덜란드의 가치를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2002년 총선 때의 인터뷰
포르타윈은 미국 네오콘의 논리에 찬성했지만, 네오콘에 비해 공격적인 대외 전술보다는 소프트 파워를 통한 이슬람 "계몽"과 후진적 무슬림으로부터 세속주의 가치의 방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이슬람 이민자를 반대하는 이유로 "다시 여성 해방과 동성애 해방을 이루어내야 할 만큼 사회가 퇴보하는 것을 막고 싶다"라고 답했다. 또 경제적인 이유도 꺼내 들었는데, 이미 인구가 1,600만인 네덜란드가 4만 명씩 이민자를 받을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계속 난민이 밀려들어 오면 네덜란드인들의 일자리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선동했다.

네덜란드의 좌우파는 포르타윈을 장 마리 르펜, 외르크 하이더[4] 같은 극우 리더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포르타윈은 르펜, 하이더 등 극우파를 혐오한다고 주장했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같은 중도 우파나, 존 F. 케네디와 같은 좌파 인사도 존경한다고 밝혀 논란을 불식시키고자 했다. 그는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총리라고 평가받는 요프 던아윌(Joop den Uyl)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슬람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타협적인 노선을 내세웠다.

2.4. 정계 입문

2001년, 포르타윈은 공개적으로 정치 입문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빔 코크 총리가 이끄는 당시 정부를 "보라색 내각"이라고 비난했다. 보라색은 노동당의 빨강, 자유민주인민당의 파랑, 기독교민주당의 초록을 섞은 색으로 세 당의 연정인 현 정부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애매모호한 엘리트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타윈은 놀라울 정도로 포퓰리즘적인 자세를 취하며 중도 좌파의 엘리트성을 지적하고 자신을 "민중의 대변인"으로 삼았다. 선거 구호 역시 "국민 여러분이 명하신 대로!"였다. 정작 포르타윈 본인은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명문 대학교 교수를 지낸 엘리트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포르타윈은 처음에 살기 좋은 네덜란드(Leefbaar Nederland)라는 당에 입당했지만, 이슬람 혐오 논란이 일어 당에서 제명당했다. 지역 정계에서는 자신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로테르담을 거점으로 삼고, 살기 좋은 로테르담(Leefbaar Rotterdam)을 창당해 활동했다. 포르타윈은 2002년 있을 네덜란드 지방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 정당을 통해 영향력을 입증하고자 했다. 선거 결과는 놀라웠는데, 살기 좋은 로테르담은 무려 37%를 득표해 30년 동안 이어진 노동당의 일당 우위 정권을 무너트리고 로테르담 지역 정계를 장악했다. 시의회 45석 중 17석을 차지한 대승리였다.

파일:Verkiezingsposters_Pim_Fortuyn_mei_2002-801x500.jpg
핌 포르타윈의 2002년 총선 포스터

포르타윈은 2002년의 총선을 위해 핌 포르타윈 명단(LPF)이라는 사당을 만들었다. 이 당은 초기 지지율이 2%에 불과했지만, 지방 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선거 직전 지지율이 9%까지 상승했다. 포르타윈은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적으로는 다문화주의의 금기를 무너트리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인종, 피부색, 정체성 등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네덜란드 법 조항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5]

그럼에도 여전히 네덜란드 사회는 그의 급진적인 보수 공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좌우파의 주요 정당이 그의 당과의 연대를 거부하며 지지율은 정체되었다. 포르타윈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을 "악마화"한다고 주장하며 포퓰리즘적 메시지를 두 배로 강화하였다. 그런데...

2.5. 암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핌 포르타윈 암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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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3.1.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미친 영향

핌 포르타윈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네덜란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등장 이전까지, 네덜란드 사회에서 이민자나 소수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특히 다문화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정치권에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포르타윈은 자신이 나치가 아님을 항변하고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바로 그 진보를 지키기 위해 다문화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현대 네덜란드 우익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을 이루는 여러 담론을 만들었다.

그의 암살 이후 여러 우익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등장했으며, 네덜란드의 다문화주의와 이슬람 문화 수용에 비판적인 의견이 늘어났다. 2006년 총선에서 포르타윈의 정당은 몰락했지만, 사실상 포르타윈과 똑같은 정치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더욱 대중적인 호소력과 정치력을 같춘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등장하며 포르타윈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다. 빌더르스 역시 동성애, 여성 인권, 대마초 합법화, 안락사 등 네덜란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의제에 모두 공감하지만[6], 동시에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이민에 반대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3.2. 현대 우익 정치에 미친 영향

현대 유럽과 미주 대륙의 우파 정치에도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비록 포르타윈 그 자신이 극우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오늘날 우익~극우 정치의 담론에 포르타윈이 미친 영향력을 묵과할 수 없다.

포르타윈은 공화주의자이자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표현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네덜란드 헌법 7조가 다양성을 명시한 헌법 1조보다 우위에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포르타윈은 옛 나치처럼 노골적으로 인종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혐오 표현을 할 자유, 특정 손님을 거부할 자유 등 개개인의 자유에 기반을 둔 차별을 저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현대 서구권의 우익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던 피터슨을 위시로 한 반정체성 정치, 반정치적 올바름 우파들은 다양성의 표현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를 내세우며 혐오 표현을 교정하려는 정부의 규제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이미 25년 전에 포르타윈이 내세운 핵심적인 주장이다. 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논리도 포르타윈이 몇십 년 전에 앞서 주장한, 사회적 약자나 다양성 보호의 이유로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68 혁명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현대 우파가 포르타윈에게 빚진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포르타윈은 "극우"의 이미지를 바꾼 것으로도 평가된다. 포르타윈이 등장하기 전 에녹 포웰과 같은 극소수를 제하고는 극우의 이미지는 장 마리 르펜이나 이탈리아 북부 동맹, 영국 국민당같이 시끄럽게 폭동을 일으키는 반유대주의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젊은 대학교수인 포르타윈은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고, 그 자신도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현상이며, 그저 우익 폭력배로만 여겨졌던 극우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일각에서 냉철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포르타윈의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3. 네덜란드 내에서의 평가

파일:핌 포르튀인 동상.jpg
로테르담 중심가에 위치한 핌 포르타윈의 동상.[7]

네덜란드에서 핌 포르타윈은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사후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언급될 정도로 지명도 높은 중요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잘생기고 젊은 명문대 교수 엘리트가 선거을 며칠 남겨두고 암살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신화가 되었고, 일부 정치학자들은 그를 로버트 F. 케네디에 빗대 "네덜란드의 케네디"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정치적인 면을 벗어나, 포르타윈의 개인적인 성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네덜란드에 적지 않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말하는 투쟁가로서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뷰-NSS의 2007년 조사에서, 포르타윈 사망이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네덜란드 인구 25%가 포르타윈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에게 투표할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같은 조사에서 국민의 40% 이상이 "새로운 포르타윈"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57%는 그를 "좋은 연설가"로, 37%를 "불편한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솔직한 정치 지도자"로 묘사했다. 우익 폭력주의자, 외국인 혐오자, 호전적 전투광 등 부정적으로 묘사한 여론은 각각 15%, 10%, 10%에 그쳤다.

2004년 네덜란드 공영 방송국이 조사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포르타윈은 국부 빌럼 1세나 반고흐, 렘브란트, 준국부 수준인 빌헬미나 여왕 등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해 네덜란드 정치 평론가들을 충격에 빠트린 바 있다. 하지만 이 투표 결과가 포르타윈 사망 2년 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소 감정적으로 답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아예 투표 조작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죽음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빈센트 반고흐의 종증손자이자 우익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테오 판호흐는 그의 죽음이 좌파 기득권의 음모이며 이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한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그 자신도 2004년 암살의 대상이 되는 등 여러모로 네덜란드 정치가 포르타윈의 얘기만 나오면 분열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4. 선거 이력

<rowcolor=#2E498E>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2 로테르담 시의회 선거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
93,852 (37.8%) 당선 초선
네덜란드 하원 의원 선거 네덜란드 [[핌 포르타윈|
핌 포르타윈 명단
]]
선거 전 피살[8]

5. 여담

  • 가톨릭 신자였다. 죽기 직전에 신앙심이 꽤 강력해졌다고 한다.
  •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네덜란드 왕실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왕가를 "구시대의 유산"이라고 생각했으며,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네덜란드의 근본적 기독교도들도 이슬람교도들만큼이나 혐오하였다.

[1] 다만 이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2주 전에 반이민 활동가 테오 판호흐가 암살당했고 2년 전 포르타윈 암살 사건의 영향으로 우파가 감정적으로 포르타윈에 몰표를 던졌다는 말이 많았다. 네덜란드 내에서 존경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지만, 1위를 할 만큼 존경받지는 않고 안티도 많아서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조사 결과가 조작되었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2] 하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한다.[3] 경례하고 있는 포르타윈의 포즈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4] 오스트리아의 극우 리더로 네오나치로 악명 높았다.[5] 헌법 1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받았는데, 자신은 형법 137조를 언급한 거라며 한발 빼기도 했다.[6]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정책이나 표결 결과는 대단히 보수적이다.[7]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훼손되는 동상이라고 한다.[8] 사망 당시 이미 선거용지가 인쇄 된 상태였기에 출마가 철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