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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멜리얀 푸가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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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전러시아의 반란자
Пугачёв | 푸가초프
파일:0001-001-narodnyj-zaschitnik-ili-zlodej.jpg
제호
(자칭)
표트르 3세
종교 러시아 정교회 고의식파
직업 군인
출생 1742년
러시아 제국 볼고그라드
사망 1775년 1월 21일 (향년 33세)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성명 예멜리얀 이바노비치 푸가초프
Yemelyan Ivanovich Pugachev
Емельян Иванович Пугачёв
아내 소피아, 우스티니아[1]
재위
(자칭)
1774년 ~ 1775년 1월 21일

1. 개요2. 일생3. 창작물에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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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칭 차르이자 푸가초프의 난으로 알려진 농노 봉기의 지도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푸가초프는 돈 카자크의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의식파 정교도였다. 카자크로서 7년 전쟁에 출전하여 우수한 전공을 거두었다. 참전 전 소피아 네두제바란 여인과 결혼을 해 1남 2녀를 뒀으며 반란 중에 다른 카자크의 딸이자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던 우스티니아와 결혼하였다.

2. 일생

당시 러시아 농민들은 예카테리나 2세의 지나친 친독일, 친귀족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 쿠데타로 재위에 올랐고 때문에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농노들의 권리를 계속해서 제한하였으며, 국유지를 종종 자신이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하사했는데 그 순간 해당 국유지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농노로 신분이 추락하였다.

또한 예카테리나는 카자크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생활을 제한하고 이들을 예속화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여 카자크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푸가초프는 겸손하고 덕망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아내 예카테리나에 의해 유폐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은 표트르 3세를 자칭하여 농노제의 폐지를 선언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한 번은 그가 카잔에 있는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카잔의 간수들이 오히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석방해주고 같이 봉기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푸가초프의 난에는 농민 만이 아니라 카자크, 러시아 정교회 고의식파 및 볼가 강 유역의 여러 소수민족(볼가 타타르, 추바시인, 마리인, 바시키르인)들이 대거 합세했다. 푸가초프의 세력권은 카잔오렌부르크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볼가강우랄 산맥에 번질 정도로 거대해졌다[2]. 하지만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의 진압이 시작되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푸가초프는 1774년 9월 14일에 체포되었고, 철 우리에 감금되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1775년 1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공개처형되고 사지가 분리되어 각지로 보내졌다.

3. 창작물에서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대위의 딸의 주 배경이 푸가초프의 난이며, 소련 초기에 활동한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도 1921년에 푸가초프를 주인공으로 다룬 시를 썼다. 1996년 독일의 TV 영화 캐서린 제타 존스의 더 그레이트에서는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김리 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리스데이비스가 푸가초프 역을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사극 예카테리나 시즌3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아르투르 이바노프(Артур Иванов).

4. 여담


푸가초프의 가족들은 반란이 진압 된 후 프리오제르스크란 작은 도시의 요새로 유배형을 당하였고 죽을 때 까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푸가초프의 두 아내 가운데 소피아는 1804년 이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스티니아는 1808년 사망하였다.

푸가초프의 경우 여색을 밝히는 경향이 심했는데 반란 중 함락시킨 러시아군 요새 사령관의 아내를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첩으로 들였다. 타티아나 카를로바(1756-1773)란 여인으로 Tatishchevo 요새의 사령관 그리고리 엘리긴 대령의 딸이였던 카를로바는 1773년 봄 이웃한 니즈네오제르나야 요새의 사령관이였던 이바노비치 카를로프 소령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같은해 일어난 푸가초프의 봉기로 인해 부모님과 남편이 살해당하는 비극속에 강제로 푸가초프의 첩이 되어야만했고 그에 불만을 품고있던 푸가초프 부하들에 의해 푸가초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총살을 당했다.


[1] 1757 - 1808[2] 소설 대위의 딸에서는 푸가초프의 부하들에 대해 "그들은 (푸가초프가) 대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두려워하거나 아부하지 않았고, 모두 자기가 할 말을 거침없이 했으며 그 말들을 푸가초프는 다 들어주었다."라고 서술하여 푸가초프의 무리가 나름대로 꽤나 민주적이라고 묘사했다.